15년 쯤 전에 난 국내 대표적인 인터넷신문 중 한 곳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 무렵은 IMF 한파가 거세게 휘몰아치던 시절. 즐거운 뉴스라곤 찾아보기 힘든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즐거운 소식이 있었으니 바로 박찬호였다. 당시 LA다저스에서 뛰던 박찬호 선수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말로만 듣던 메이저리그 강타자들을 삼진으로 돌려세우던 박찬호 선수의 모습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그 때 우린 또 다른 인터넷신문사와 엄청난 속보 경쟁을 하고 있었다. 그 때는 포털 뉴스란 것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 양대 언론사의 인터넷신문이 속보 경쟁의 중심축 역할을 하던 시절이었다.
돌이켜보면 웃음만 나오는 15년 전의 박찬호 속보 경쟁
특히 박찬호 선수가 선발 등판해서 승리투수가 되는 날이면 속보 경쟁이 불을 뿜었다. 우선 그 얘기를 해보도록 하자.
(다른 선발투수도 그렇지만) 박찬호 선수도 (이기고 있는 경기라 할 지라도) 대개는 7회를 전후해서 내려가게 마련이다. 그 때부턴 본격적으로 불펜진이 가동된다.
당시 LA다저스의 마무리 투수는 제프 쇼였다. 기억하는 사람은 기억할 테지만, 제프 쇼 선수는 '막강 마무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다 보니, 다저스가 이기고 있는 경기의 9회는 늘 아슬아슬했다.
우린 일단 박찬호 선수가 승리투수가 된다는 가정 하에 기사를 다 써놓고, 제목까지 완성시켜 놓은 상태에서 제프 쇼의 '마무리 곡예'를 지켜봤다. 마지막 아웃이 선언되자마자 '버튼'을 눌러서 판을 갈기 위해서였다.
아마도 우리 쪽의 '버튼 작동 실력'이 좀 더 나았던 모양이다. 경쟁사와의 속보 경쟁에서 주로 이겼던 기억이 있다. 그래봐야 차이나는 시간은 1분 30초 내외. 하지만 우린 1분30초 먼저 톱 기사를 갈아끼운 사실에 뿌듯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독자들은 그 차이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 무렵 박찬호 선수 경기 중계를 할 때는 웬만한 사무실에선 텔레비전을 켜놓을 정도였으니.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소식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때는 수시로 인터넷 들어와서 뉴스 확인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던 시절이었다.
어쨌든 두 회사 편집진 외엔 그 누구도 관심 없는 경쟁 때문에 우리는 거의 30분에서 한 시간 가까운 시간 동안 아무런 일도 하지 못했다.
지금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는 한국 인터넷신문 역사 초기의 웃지 못할 에피소드다. (하긴 요즘엔 이런 경쟁을 하는 기사에도 [단독]이라고 붙여서 내보내는 언론사가 있으니, 그래도 그 때는 양심적이었던 것 같다.)
속보 쫓다가 대형 망신 당한 CNN
주말 오후에 웬 인터넷신문 드립? 이라고 할 지 모르겠다. 오늘 이런 저런 뉴스를 뒤적이다가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건강보험 개혁법 위헌 여부 판결을 둘러싸고 한 바탕 소동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CNN과 폭스뉴스가 대형오보를 날린 모양이다.
오바마케어(ObamaCare)로 불린 건보법 개정안은 미국 대선 경쟁의 핵심 쟁점으로 불릴 정도로 초미의 관심사다. 특히 쟁점이 된 부분은 '개인의무가입 조항'이었다. 결국 공방 끝에 이 조항은 대법원까지 올라가게 된 것. 대법원이 지난 28일(현지시간) 이 조항의 위헌 여부에 대한 판결을 내리기로 돼 있었다.
오바마의 건강보험법 개혁안은 미국민들의 눈과 귀가 쏠려 있는 사안. 1990년대 후반 한국 국민들이 박찬호 선수 경기에 기울였던 관심보다 훨씬 더 큰 관심을 받는 사안이었다. 당연히 엄청난 속보 경쟁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CNN이 조금 오버를 해 버렸다.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인 이날 오전 10시7분 '대법원, 개인가입 의무조항 위헌 판결(Supreme CT. kills individual mandate )'이란 속보를 내보낸 것이다. CNN은 트위터를 통해서도 이 소식을 곧바로 쏴줬다. 그런데 이게 오보였던 것이다. 대법원은 합헌 판결을 내렸던 것이다.오바마 대통령조차 CNN 속보를 보고, 한 동안 자신의 건강보험 개혁안이 위헌 판결을 받은 줄 알았다고 한다. 이 쯤 되면 초대형 사고가 아닐 수 없다.
(오바마 대통령이 CNN 기사가 떠 있는 태블릿을 들고 있는 아래 사진은 개리 히란 사람이 만든 것이다. 트루만 대통령이 자신이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했다고 보도한 신문을 높이 들고 있던 사진을 패러디한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법원 판결문을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게 좀 애매하다. 기사 문장과 달리 '위헌 판결한다'고 서두에 선언해주는 게 아니다. 끝까지 다 읽고, 곰곰히 의미를 파악해야만 알 수 있다. CNN이 어떤 경로로 그렇게 판단했는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판결문을 오독해서 '위헌'이라고 내지른 셈이다.
이번에 CNN이 오보를 냈다는 걸 처음으로 밝혀낸 건 로펌에 근무하는 81세 블로거 였다. 그래서 CNN은 이번 오보 파동이 더 아플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CNN은 "판결 의미를 재빨리 파악하는 능력이 81세 블로거보다 못하냐?"는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미국의 미디어 전문가들 사이에선 CNN의 이번 오보 파동을 놓고 공방이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당연하게도 트위터를 비롯한 소셜 미디어가 뉴스 소비의 중심이 된 시대에 특종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성찰의 목소리도 적지 않게 제기되고 있다.
CNN의 이번 오보 파동으로 '과정으로서의 뉴스'란 개념이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다. 제프 자비스가 처음 제기한 '과정으로서의 뉴스'는 소셜 시대 뉴스의 특성을 잘 짚은 개념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이제 뉴스는 완성품이 아니라, 소셜 미디어를 통해 계속 새로운 사실이 덧붙여지면서 발전해나가는 것이란 게 '과정으로서의 뉴스' 개념의 기본 골자다. (과정으로서의 뉴스 개념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은 뉴스는 완성품이 아니라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참고하라.
미국 NPR의 앤디 카빈이란 사람이 아랍권의 민주화 시위 당시 트위터를 통해 실시간 뉴스를 전해준 것이 '과정으로서의 뉴스'를 구현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과정으로서의 뉴스 개념 놓고 치열한 공방
그런데 일부에선 CNN의 이번 오보 파동도 '과정으로서의 뉴스'로 봐줄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주장을 하고 있다. 대표적인 게 포인터연구소의 스티브 마이어란 사람이다. 그는 CNN이 오보를 내긴 했지만, 재빨리 오보를 수정하고 진전된 내용을 보도한 자체를 '과정으로서의 뉴스'로 봐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CNN은 이번 보도 과정에서 "현재 알고 있는 것을 보도한 뒤 잘못된 내용은 다음에 수정한다"는 자비스의 '과정으로서의 뉴스' 개념에 충실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비판이 거세다. 대표적인 것이 기가옴의 매튜 잉그램 기자다. 그는 지난 해 NPR의 앤디 카빈이 했던 것과 이번 대법원 판결 사례는 성격이 다르다고 반박했다. 아랍권의 민주화 시위는 어느 쪽으로 진행될 지 알 수 없는 사건인 반면, 대법원 판결은 모든 사람들이 판결문 카피본까지 갖고 있는 사안이기 때문에 '과정으로서의 뉴스'라고 보기 힘든 사안이란 것이다. (하긴 그나마 CNN은 나은 편이다. 바로 오보였다고 실토를 했으니, 머독 계열인 폭스뉴스는 한참 동안 오보가 아니라고 빡빡 우긴 모양이다.)
어쨌든 CNN의 이번 오보 사태는 소셜 미디어 시대 특종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만든 사건이었던 것 같다.
다시 처음 얘기로 돌아가 보자. 15년 전 경쟁사와의 속보 경쟁에서 이길 때마다 우리는 뿌듯해했다. 역시 우리가 한 수 위라며 엄청 좋아했던 기억도 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정말 부질없는 경쟁이었다. 그보다는 박찬호 경기를 좀 더 입체적으로, 의미 있게 분석해주려는 노력을 했더라면, 독자들에게 더 많은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그건 요즘도 마찬가지다. 특종도 좋고, 최초 보도도 좋지만, 이젠 예전에 비해 최초 보도의 의미가 많이 퇴색됐다. 뉴스 순환 사이클이 워낙 빨라졌기 때문이다. '과정으로서의 뉴스'란 개념이 나온 것도 이런 시대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니 특종과 속보 경쟁에 대한 언론사의 마인드도 많이 바뀌어야 할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