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소셜 미디어를 적극 활용하는 언론사들이 많다. 특히 기사 유통 채널로 많이 활용한다. 지난 해 사이트 유료화를 단행한 뉴욕타임스 같은 경우 소셜 미디어 링크를 타고 들어올 경우엔 무료로 볼 수 있도록 할 정도다. 


그런데 소셜 미디어를 활용해 기사를 유통시키는 것이 얼마나 효과를 볼까? 특히 신뢰성엔 어떤 영향이 있을까?


이런 의문을 해결해 줄 논문이 발표됐다.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의 Mike Schmiebach 교수와 마케팅 전략 전문가인 Anne Oeldorf-Hirsch가 공동 발표한 'A Little Bird Told Me, So I Didn't Believe It: Twitter, Credibility, and Issue Perceptions'란 논문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 논문이 나름 흥미롭다. 성급한 독자들을 위해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같은 기사라도 트위터를 통해 내보낼 경우 신뢰도가 확 떨어진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독자들이 그냥 사이트에서 본 기사보다 덜 믿는다는 것이다. 


연구 방법은 간단하다. 독자들에게 세 가지 종류로 기사를 보여줬다. 뉴욕타임스 공식 트위터 계정(@nytimes)을 통해 링크한 기사를 누르고 보도록 하는 한편, 같은 기사를 뉴욕타임스 홈페이지에서 직접 보도록 한 뒤 신뢰도를 비교 분석한 것이다. 비교 결과는 아래 테이블과 같다. 



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트위터 링크를 통해 볼 경우 뉴욕타임스 사이트에서 직접 같은 기사를 읽을 때에 비해 메시지 신뢰도, 정보원 신뢰도, 중요성 등이 모두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 마디로 트위터를 이용해 기사를 배포할 경우 독자들이 받아들이는 신뢰도가 더 낮아질 수가 있다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이런 결과를 토대로 한 가지 의미 심장한 지적을 했다. 뉴욕타임스가 사이트를 전면 유료화 한 이후 소셜 미디어 링크를 통할 경우엔 공짜로 볼 수 있도록 했는데, 이게 과연 잘 한 정책인지 생각해볼 대목이란 것. 한 마디로 기사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런 연구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늘 그렇듯이, 지나친 일반화는 조심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연구가 던지는 함의에 대해선 곰곰 따져볼 필요가 있다. 트위터를 이용해 기사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것이 과연 매체 영향력에 플러스 효과가 있냐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물론 소셜 미디어를 적극 활용하는 것은 중요하다. 최근 여러 연구 결과를 보더라도 사이트를 직접 방문하는 비율은 갈수록 낮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선 소셜 미디어를 적극 활용하는 것은 분명 큰 도움이 된다. 아니 도움이 되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 권장해야 할 부분이다.


그런데, 만약 그런 경로를 통해서 기사를 접할 경우 독자들이 받아들이는 신뢰도가 현저히 낮아질 경우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논문은 이런 질문을 던져줬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네이버 뉴스캐스트 아웃링크 신뢰도는 어떨까? 


또 한 가지. 한국적인 특수 상황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바로 뉴스캐스트다. 트위터를 통해 메시지를 접할 경우에도 저렇게 신뢰도가 떨어지는 데, 뉴스캐스트 아웃링크를 통해 기사를 접할 경우 기사에 대한 신뢰도가 더 떨어지지 않을까? 뭐, 최근 각 언론사들이 독자들의 눈을 사로잡기 위해 혈안이 돼 있는 터라 신뢰도 얘기하기가 사치스럽긴 하지만, 어쨌든 이런 부분에 대한 고려도 한번쯤은 해봐야 할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국내에선 그런 연구를 한번 해 보면 좋겠다. 언론사 사이트에 직접 접속할 때와, 뉴스캐스트 링크를 통해 접할 때, 그리고 트위터 같은 SNS 링크를 통해 접할 때 독자들이 받아들이는 신뢰도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비교 분석해 보는 연구. 같은 기사를 갖고 한번 연구해보면 좋지 않을까? 이거 네이버에서 프로젝트로 한번 해 보면 안 되나? 


이 글을 쓰는 덴 포인터연구소 기사를 많이 참고했다는 점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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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6월8일. 잉글랜드 체셔 주 윔슬로우의 한 조용한 저택에서 시체가 발견됐다. 그 무렵 동성애자란 사실이 알려지면서 '화학적 거세'란 치욕적인 형벌을 받은 앨런 튜링이었다. 


하루 전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 튜링의 곁에는 한 입 베어문 사과가 놓여 있었다. (지난 해 작고한 스티브 잡스가 앨런 튜링을 굉장히 존경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 그래서 애플이 한 입 베어문 사과를 로고로 선택한 것은 튜링에 대한 잡스의 존경심 때문이란 설도 분분한 편이다. 물론 잡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부인했다.)


앨런 튜링. 현대 컴퓨터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튜링이 1936년 알고리즘 대한 엄밀한 수학적 정의를 위해 도입한 튜링 기계란 개념은 이후 컴퓨터 과학의 토대가 됐다. 


난 개인적으로 튜링의 글을 읽어본 적은 없다. 하지만 하마터면 튜링과 인연을 가질 뻔한 적은 있다. 그러니까 지난 2010년 무렵이었던 것 같다. 당시 볼터의 '글쓰기의 공간(Writing Space)' 번역을 막 끝내고 난 뒤 출판사에서 튜링 책을 한번 번역해보면 어떻겠느냔 얘기를 해 왔다. 당시 난 깊이 생각하지 않고, 거절했다. 


거절한 이유는 딱 두가지였다. 대가의 책을 번역할 깜냥이 못 된다는 겸손한 마음이 하나요. 또 하나는 번역하는 수고에 비해 비해 돈(이나 명예)가 그다지 뒤따라올 것 같지 않다는 현실적인 판단이 또 하나였다. (대중성이 없는 거야 두 말 하면 잔소리일테고, 학계에서도 그 책 읽을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아 보였기 때문. 튜링에 관심을 가질 정도 학자면 원서로 그냥 읽어볼테고.)


어쨌든 이번 달 들어 튜링 이야기가 언론에 많이 보도되고 있다. 지난 6월23일이 튜링 탄생 100주년 기념일이기 때문이다. 국내 거의 모든 언론들이 튜링의 삶을 조명하는 짤막한 기사들을 쏟아냈다.


2년 전인가 앨런 튜링을 다룬 책이 국내에 번역 출간된 적이 있다. 그 당시 책 제목이 '너무 많이 알았던 사람'이었다. 물론 원서 제목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개인적으로, 저 책 제목은 앨런 튜링이란 천재를 묘사하는 적합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잠깐 몇 년전 유행했던 '뷰티플 마인드'란 영화를 한번 떠올려보자. 역시 불행한 삶을 살았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존 내시를 다룬 그 영화에 보면 내시가 암호를 해독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또 옆으로 새면, 미국에서 주파수 경매를 할 당시 존 내시의 이론이 많이 활용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전쟁과 암호해독에서 진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앨런 튜링이다. 탁월한 천재였던 튜링은 전쟁 당시 '에니그마'란 독일군의 암호 시스템을 해독해냈다. 덕분에 연합군이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물론 내가 더 관심을 갖는 건 컴퓨터 과학의 기초를 닦은 부분이다. 튜링은 1936년 'On Computation Numbers ~ ' 란 논문을 한 편 쓴다. 여기서 그는 후대 컴퓨터 과학의 토대가 된 중요한 주장을 하나 펼친다. 


that any computable problem could be computed on a machine, with calculations controlled by means of encoded instructions; and that code, rather than machine, was the essence of a computer.


여기서 튜링은 기계가 아니라 코드가 컴퓨터의 핵심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빌 게이츠가 도스 기반으로 돌아가는 IBM PC를 선보이기 무려 45년쯤 전의 일이다. 이쯤 되면 애플의 로고가 튜링을 염두에 둔 것이란 주장이 나오는 것도 그리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튜링은 이 외에도 현대 과학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튜링이 어떤 사람인지 개략적으로 알고 싶은 사람은 위키피디아를 한번 뒤져보시라. 20세기 초반에 21세기적인 삶을 살았던 이 천재에 대해 좀 더 깊은 관심이 생기는 사람은 몇 년 전에 출간된 '너무 많이 알았던 사람'이란 책을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지금 영국을 중심으로 튜링을 기리는 여러 모임들이 열리고 있는 모양이다. 당연히 그의 학술적 업적도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튜링이 남긴 위대한 업젝은 Allan Turing's Legacy Lives On이란 와이어드 기사가 잘 정리했다.  


여담으로 한 마디.


2차 대전 승리의 숨은 공신이었던 튜링은 전쟁 이후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 독특한 성적 취향 때문이었다. 인류 역사 속의 많은 천재들이 그랬듯, 튜링 역시 동성애자였다. 지금도 동성애자의 삶이 그다지 순탄하지 못하지만, 그 때만 해도 '동성애=정신 이상자' 수준으로 받아들여지던 시절. 인류 역사상 손꼽히는 천재였던 튜링은 결국 화학적 거세를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힘들게 살던 튜링은 결국 1954년 6월7일. 짧지만 강렬했던 삶을 스스로 마감했다. 앞에 적은 것처럼 그의 곁에는 한 입 베어문 사과가 놓여 있었다. 튜링 옆에 놓여 있던 사과가 매킨토시 종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여기서 잠깐 내 의견을 덧붙이자면. 물론 나는 동성애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싫어한다. 하지만 단순히 동성애자란 이유만으로, 인류의 위대한 천재에게 화학적 거세란 수모를 안긴 폭력은 참을 수가 없다. 그러고 보면, 인간들은 자기와 다른 사람은 도저히 용납하지 못하는 독선으로 똘똘 뭉친 존재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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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나 기차를 길게 탈 경우 '읽을거리'가 없으면 굉장히 허전하다. 예전엔 화장실에 갈 때도 그랬다. 금방이라도 '큰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상황에서도 들고 들어갈 책을 찾느라 우왕좌왕한 경험이 적지 않다. 


'리드 잇 레이터(read it later)'란 서비스가 인기를 끄는 걸 보면, 나 같은 사람이 적지 않은 모양이다.


이런 기능을 가진 대표적인 앱이 뉴스닷미(news.me)와 인스타페이퍼(instapaper)다. 둘은 모두 읽을 만한 글들을 지정한 뒤 나중에 시간날 때 읽을 수 있도록 해 주는 서비스다. 이 쯤 되면 스마트폰이 참 여러 가지 역할을 한다. (이러니 책이 안 팔리지. 이동할 때도 스마트폰에 모든 걸 저장해 뒀다가 바로 읽을 수 있으니. 책 한 권 써서 대박 내겠다는 꿈은 진작 포기해야 할 것 같다.)


당연히 뉴스닷미와 인스타페이퍼는 엄청나게 인기를 끄는 앱들이다. 특히 인스타페이퍼는 4달러를 웃도는 '만만찮은' 가격에도 불구하도 아주 잘 팔린다.





그런데 이런 '리드 잇 레이터' 서비스만으론 한계가 있다. 깜빡 잊고 '나중에 읽을' 콘텐츠를 지정해 놓지 않을 경우 낭패를 볼 우려가 있다. (참고로 난 화장실에 책 들고 들어가는 버릇에 푹 빠졌을 땐, 빈손으로 들어가면 볼 일 보는 게 수월치 않았던 경험이 있다.)


이런 불평들이 많았나 보다. 뉴스닷미에 이어 인스타페이퍼도 지역 서비스 기반 자동 업데이트 기능을 추가했다고 한다. 


먼저 선보인 것은 뉴스닷미다. 한 달 쯤 전 뉴스닷미는 '페이퍼보이' 기능을 추가했다. 이 기능의 기본 콘셉트는 간단하다. 일단 스마트폰 주인이 집을 나서기만 하면 최신 뉴스를 자동 업데이트해주는 것이다. 길 거리에서, 혹은 대중 교통을 이용해 이동할 때 심심한 상황에 빠지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해주는 것이다. 


이번에 인스타페이퍼가 선보인 기능은 여기서 한 발 더 나간다. 집, 사무실 등 주요 장소를 10곳까지 지정해 놓을 수 있다. 그런 다음 그 곳을 나서면, 스마트폰 주인이 가장 관심을 가질만한 콘텐츠를 미리 알아서 다운받아 놓는다는 것이다. 인스타페이퍼는 "뉴스닷미 덕에 이런 기능을 추가할 수 있었다"고까지 밝히고 있다. 


이 쯤 되면 비서 부럽지 않다. 그러면서 궁금증이 스멀스멀 고개를 든다. "도대체 저게 어떻게 가능하지?"


뉴스닷미나 인스타페이퍼의 새 기능은 `지오펜싱(geofencing)` 기법을 이용한 것이다. 지오펜싱이란 사용자의 위치를 파악해 정보를 제공하는 기법을 일컫는 말이다. 포스퀘어를 비롯해 많은 위치기반 서비스들에선 기본적으로 이용되는 기법이다. 예를 들어 길을 걷다 갑자기 비를 만날 경우 우산 살 곳을 안내해준다. 한 발 더 나가면, 어떤 길로 가면 할인 판매하는 매장이 있는지도 알려준다. 한 마디로 인공지능형 비서인 셈이다. 


그 동안 주로 쇼핑에서 많이 활용되던 지오펜싱 기법이 이젠 뉴스 소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인스타페이퍼 같은 경우 데이터베이스가 쌓이면, "사무실을 나설 때 관심을 가질만한 글" "전철을 탈 때 재밌어 할 만한 뉴스" 같은 식으로 좀 더 맞춤형 콘텐츠를 모아줄 수도 있다. 


어제 큐레이션이란 용어를 남발하지 말자는 글을 올렸다가 자그마한 논란을 일으킨 적 있다. '과잉 용어' '과잉 서비스'를 경계하자는 얘기였는데, 내가 전달을 잘못 했는 지 내 본의와 조금 거리가 있는 비판들도 있었다. 


어쨌든 각설하고. 이번에 뉴스닷미나 인스타페이퍼가 새롭게 선보인 서비스도 일종의 큐레이션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지난 해 난 '아이패드가 디지털 독서 습관을 바꾼다'는 기사를 쓴 적 있다. 지오펜싱 기법을 활용한 뉴스닷미와 인스타페이퍼의 변신 역시 이런 변화에 힘을 보탤 것 같다. 누군가 디지털 시대 독서 방식 변화를 깊이 있게 연구해보면 좋은 논문이 되지 않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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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를 풀어나가기 전에 움베르토 에코 얘기를 먼저 해 보자. 우리나라에 인터넷이 막 대중화되던 무렵. 그러니까 1990년대 중반 쯤이었던 것 같다. 당시 막 창간됐던 '이매진'이란 잡지에서 인터넷에 대한 논문을 한 편 읽게 됐다. 그 논문에 움베르토 에코 얘기가 나왔다. 내용은 이랬다.


어느 날 움베르토 에코가 논문을 쓰기 위해 인터넷에 검색을 했다. (우리에겐 소설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움베르토 에코는 뛰어난 기호학자이다.) 하지만 그는 이내 인터넷으로 자료 찾는 걸 포기해야만 했다. 자기가 쓰려는 논문과 관련된 자료들이 1만 건 이상 검색됐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돌아가, 도서관에 자료를 찾으러 가야만 했다고 털어놨다.


에코 이야기는 당시 막 인터넷에 관심을 갖던 내게 상당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에코가 겪었던 일화는 (요즘 이야기하는) 큐레이션 개념이 왜 필요한지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인 것 같다.


요즘 큐레이션이 대세다. 너도 나도 큐레이션에 관심을 갖고 있다. 나 역시도 큐레이션이란 개념이 중요하다는 사실엔 전폭적으로 공감한다. 그런데 "도대체 큐레이션이 뭐야?"란 의구심이 스멀스멀 일어나는 걸 제어할 수가 없다.





도대체 큐레이션이 뭘까?


내가 이해한 바로는, 큐레이션은 무수하게 쏟아져 나오는 자료 중에서 의미 있거나, 볼만한 것들을 골라주는 걸 의미한다. 이를테면 미술관에서 활동하는 큐레이터들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된다. 관객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작품을 사오기도 하고, 또 그 작품에 대해 설명도 해주는 역할. 인터넷 상에서 이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신종' 큐레이터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큐레이션 설명하는 글들을 보면 이런 전제가 꼭 따라붙는다. 큐레이션은 단순하게 모아주는 것(aggregation)과는 다르다. 그 얘긴 뭔가 철학이나 관점을 갖고 선별해준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그 차이를 잘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 큐레이터를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 이전에 우리가 얘기했던 'news aggregation site'들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이건 시비를 걸려는 게 아니라, 정말 몰라서 그러는 것임. 그러니 누가 나한테 큐레이션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설명 좀 해주시길.)


물론 나도 큐레이션 비슷한 개념이 중요하다는 데는 동의한다. 최근 인터넷 뉴스 시장의 헤게모니가 '생산자'에서 '유통업자'로 넘어간 상황 역시 이런 생각을 하는 데 일조를 했다. 앞에서 소개했던 에코 사례에서 볼 수 있듯, 볼만한 자료를 잘 선별해서 소개해준다면 더 없이 유용할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까지가 aggregation이고, 어떤 부가가치를 더해야 curation인지, 그걸 잘 모르겠다는 말씀이다.


이런 상황에서 도발적인 글을 하나 보게 됐다. You Are Not a Curator, You Are Actually Just a Filthy Blogger 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자신이 '말 그대로 진짜' 큐레이터(실제로 미술관에서 활동한 큐레이터)라고 소개한 이 글 필자는, 이젠 자기 표현 수단으로 큐레이션이 창작(creation)을 대체하고 있다는 표현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큐레이션, 큐레이션 하지만, 결국 당신네들은 그다지 실체 없는 존재들이란 것이다. 


좀 더 적나라한 표현도 나온다. 


Call it what you like: aggregating? Blogging? Choosing? Copyright infringing sometimes? But it's not actually curation, or anything like it.


나는 개인적으로 '용어 인플레이션'을 굉장히 싫어하는 편이다. 내가 싫어했던 대표적인 용어가 바로 웹 2.0이다. (여기서 고백 한 가지. 그런데 난 '웹2.0과 저널리즘 혁명'이란 책을 한 권 썼다. 이 모숨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고? 그 책을 읽어보면, 내가 그다지 모순된 얘기를 하는 게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아, 물론 저 책 지금 사서 볼 필요는 없다. 지금은 생명이 거의 다한 책이니까.) 

솔직히 웹(더 정확하게는 하이퍼텍스트0의 역사와 기원에 대해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탐구하는 사람이라면, 웹 2.0이라는 용어를 함부로 쓸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게다가 웹 3.0, 4.0이 마구 나오는 상황 앞에선, 그리고 그런 용어를 앞세운 담론들에 대중들이 열광하는 상황 앞에선, 그냥 할 말을 잊었다. 


어쨌든, 이 글은 애초에 큐레이션에 대해 깊이 있는 담론을 담아내려고 시작한 건 아니다. 솔직히 나는 큐레이션에 대해 잘 모른다. 그냥 앞에 적은 정도가 내가 아는 전부다. 그런데, 요즘 큐레이션이 좀 각광을 받으면서, 큐레이션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지 않은 채, 대충 다른 사람들이 쓴 글들 중에 입맛에 맞게 몇 가지 소개하면서 큐레이션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난 그런 장면이 부담스럽고 싫다는 말씀이다.


You're buying (in the attention economy at least! If not in the actual advertising economy of websites!) what someone else is selling—and you're then reselling it on your blog. You're nothing but a secondary market for someone else's work. Oh and also? You "curators" might want to be careful with your language....


내가 인용한 부분에 전부 동의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큐레이터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그 용어를 쓸 때 좀 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는 지적엔 100% 동의한다. 

PS/ 위에 소개한 글은 '더버지'가 매주 큐레이션(?) 해주는 'The Best Tech Writing of the Week'란 코너를 통해 알게 됐다. 이게 진짜 큐레이션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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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토끼'를 비롯한 토끼 시리즈로 유명한 존 업다이크란 소설가가 있다. 지난 2009년 폐암으로 사망한 존 업다이크는 '토끼 잠들다'로 1991년 퓰리처 상을 수상한 작가다. 미국 현대 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좌표를 갖고 있다.


하지만 내가 업다이크를 기억하는건 이런 화려한 이력 때문이 아니다. 두 번째 직장으로 옮기던 무렵 외신에서 업다이크란 작가가 '공동창작' 실험을 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됐다. 일종의 소설 이어쓰기 실험이었다. 업다이크가 먼저 운을 뗀 뒤 독자들이 그 뒤 이야기를 이어가는 방식이었다.  


업다이크의 실험은 당시 막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던 인터넷을 활용한 것이었다. 실험정신이 뛰어난 작가답게 새로운 매체에 걸맞은 스토리텔링 방식에 대한 고민을 직접 실험했던 셈이다.


오늘 CNN 사이트에서 흥미로운 뉴스를 하나 발견했다. 역시 퓰리처 상 수상 작가인 제니퍼 에간(Jennifer Egan)이 트위터 소설을 쓴다는 소식이었다. 제니퍼 에간의 트위터 소설 창작은 미국의 고급 문화 잡지인 '뉴요커'가 진행하는 프로젝트 중 하나다. 


이번에 에간이 집필하게 될 '블랙 박스'란 소설은 5월24일부터 6월2일까지 열흘 동안 트위터에서 선을 보이게 된다. 방식은 간단하다. 에간은 매일 저녁 8시(미국 동부시간 기준)부터 9시까지 한 시간 동안 트위터에 소설을 올린다. 물론 140자 제한이라는 트위터의 특성을 감안해 한 번에 140자 이내로 글을 올리게 된다. 


작가 입장에선 소설을 집필하는 동안 독자들과 바로 소통할 수 있다. 에간 역시 이런 부분에 대해 상당한 기대감을 나타내고 있다. 


엄밀히 얘기하자면, 집필을 끝낸 작품을 트위터에 실시간으로 공개하는 방식이다. 에간은 트위터 공개를 위해 원래 자신이 집필했던 작품의 길이를 반으로 줄였다. 이 작업을 하는 데만 1년이 꼬박 소요됐다고 한다. 


사실 에간의 실험이 유별난 건 아니다. 일본에선 이미 휴대폰 소설이 꽤 인기를 모으고 있다. 게다가 작가들이라면 누구나 '글쓰기 공간'에 대한 고민을 하게 마련이다. 내가 번역했던 '하이퍼텍스트 3.0'이나 '글쓰기의 공간' 같은 책들 역시 모두 스토리텔링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는 책들이다. 


여기서 잠시 옆길로 새어나가 보자. 영문학을 공부해보면, 시간과 의식. 그리고 그런 의식의 흐름을 잡아내는 것이 중요한 모티브라는 걸 알 수 있다. (물론 영문학의 영원한 주제인 성경과 그리스 신화, 그리고 '잃어버린 성배' 같은 것들은 논외로 하자.)


제임스 조이스나 버지니아 울프(가 한 동안 느닷없이 우리나라에서 베스트셀러 작가로 떠오른 적 있다. 지금도 불가사의다.) 같은 작가들은 3차원적인 의식을 2차원 공간에서 담아내려는 노력을 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의식의 흐름' 기법이다. 그들의 소설이 난해한 건 3차원 공간의 일을 2차원 매체에 담아낸 때문이다. '율리시스' 같은 작품도 태블릿용으로 재구성하면 좀 더 수월하게 읽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어쨌든, 난 에간의 이번 실험도 같은 차원이라고 생각한다. 글쓰기 공간에 대해 끊임 없이 고민하는 작가의 실험. 물론 여기에 잡지사의 기획이 곁들여지긴 했지만, 트위터로 소통하는 세대에 걸맞은 소설을 써보겠다는 작가의 실험정신이 없었다면 애초에 불가능한 프로젝트였을 것이다.


물론, 난 에간의 소설을 시간 맞춰서 트위터에서 읽을 생각은 없다. 실제로 이 프로젝트가 얼마나 많은 호응을 얻을 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작가 입장에선 독자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한 경험은 창작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완성된 작품을 트위터로 풀어내는 프로젝트라 하더라도 말이다.


어쨌든, 글쓰기 공간과 스토리텔링 방식을 조화시키는 문제는 영원한 숙제인 것 같다. 늘 쫓고 쫓기는 그 과정을 통해 문학을 비롯한 각종 글쓰기가 진화 발전하는 지도 모를 일이다. 


(올해 초 야심적으로 선언했던 T. S 엘리엇 '황무지' 앱 읽기는 여전히 손도 못 대고 있다. 먹고 살기 바쁜 내겐 글쓰기 공간과 스토리텔링 간의 변화 발전을 추구하는 건 너무나 먼 주제인 모양이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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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중반 '웰(WELL)'이란 인터넷 공동체가 있었다.  웰은 1960년대 반문화 운동의 핵심 멤버였던 스튜어트 브랜드가 주축이 돼 1985년 처음 시작된 인터넷 커뮤니티다. '웰'은 설립 초기 게시판 형식으로 운영되다가 차츰 웹의 특성을 살려 커뮤니티를 확장해 나갔다. 온라인 프라이버시 문제 등을 처음으로 이슈화한 것도 바로 웰이다. 


하지만 웰이 인터넷 발전 역사에 끼친 영향은 이런 부분 때문만은 아니다. 웰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많은 사람들이 훗날 인터넷 역사에 중요한 자양분들을 덧붙여 준 점이 더 중요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초기 멤버로 활약했던 미치 카포와 존 페리 발로우는 그 뒤 대표적인 온라인 시민 단체인 전자 프론티어 재단(EEF)을 설립했다. 지난 해 번역 출간된 '기술의 충격' 저자인 케빈 켈리 역시 웰의 핵심 멤버 중 한 명이다.


이들 못지 않게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 있다. 바로 하워드 라인골드이다. 우리에겐 '참여군중(Smart Mobs)'이란 책으로 유명한 인물. 하지만 라인골드는 이미 1993년에 '웰' 운영 경험 등을 토대로 'Virtual Community(가상공동체)'란 책을 내놓으면서 인터넷 초기 문화에 대한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해 줬다.


휴대폰 등을 활용한 똑똑한 군중의 힘을 보여줬던 '참여군중'은 첫 저작인 '가상공동체'를 내놓은 지 꼭 10년 만에 출간한 책이다. '똑똑한 군중'이란 원제를 참여군중으로 탈바꿈시킨 건 그 무렵 참여정부 출범과 함께 시민들의 참여가 중요한 덕목으로 떠오른 걸 간파한 편집자의 재치 때문이었을 것이다. 


('참여군중'에서 읽은 내용 중 기억에 남아 있는 것. 라인골드는 당시 그 책에서 "인류 전체가 P2P 언론에 참여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란 질문을 던졌다. 당시만 해도 P2P방식의 언론은 상상도 제대로 못할 무렵. 하지만 이후 라인골드가 이야기했던 P2P 방식의 언론은 페이스북, 트위터 같은 각종 소셜 미디어를 통해 실제로 구현됐다.)


그리고 또 다시 9년. 이번엔 'Net Smart'란 책을 펴냈다. '온라인 세상에서 번성하는 법'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에서 저자인 라인골드는 다섯 가지 웹 리터러시를 제시하고 있다고 한다. attention, participation, collaboration, “crap detection,” and network smarts이 바로 그것들이다. 


라인골드는 이번 책을 저술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과 만났다고 한다. 위키피디아 창업자인 지미 웨일즈 같은 거물급들. 저자 자신이 갖고 있는 통찰력에다 이들의 풍부한 경험을 결합해 소셜 미디어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를 담아냈다는 게 외신들의 평가다.


최근 스마트폰을 늘 손에 지니고, 구글이나 페이스북을 쉴 새 없이 활용하면서 사람들이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는 비판이 만만치 않게 제기되고 있다. 이런 입장을 보이고 있는 대표적인 사람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The Shallow)'이란 책을 내놓은 니콜라스 카이다. 


그 동안의 행보로 보면 당연할 테지만, 하워드 라인골드는 이런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가 이번 책에서 5가지 웹 리터러시를 제시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교육을 통해 잘 활용하기만 하면 생활에서 유용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책을 안 읽어봐서 모르겠지만, 나는 니콜라스 카보다는 하워드 라인골드 쪽에 한 표를 던진다. 사실 뉴미디어 때문에 사람들이 사고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플라톤 이래 수 많은 사람들이 경고해 왔던 메시지다. 하지만 그런 접근은, 스마트폰 조차 사람 몸의 확장이라고 간주하게 되면, 또 다른 관점으로 접근할 수 있다. 따라서 기술의 위협을 경계하는 것도 의미 있지만, 우리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뉴미디어를 어떻게 하면 좀 더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을 지에 대한 고민을 담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번에 출간된 하워드 라인골드의 'Net Smart'가 기대되는 건 바로 이런 배경 때문이다. 영어 잘하고, 뉴미디어에 밝은 분이 이 책을 빨리 번역해줬으면 좋겠다. 나처럼 원서 한 권 들고 몇 달씩 낑낑댈 여유가 없는 사람이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도록. ^^


읽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 책에 대해 더 아는 척 하는 건, 거장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10년 정도 성찰의 시간을 가진 뒤 농익은 통찰력을 담아내는 라인골드인 만큼, 이번 책 역시 기대에 충분히 부응할 것이란 점. 외신들의 소개를 보면 이번 책은 이전 책들에 비해 학술적인 외피를 좀 덜 두르고 있는 것 같다. 자기 주변 얘기를 하면서, 상당히 흥미롭게 서술해 나갔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하워드 라인골드가 MIT 미디어랩에서 한 강의를 소개하는 니먼저널리즘랩의 기사포브스의 서평 기사를 참고하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더애틀랜틱 지에 발췌 소개한 에세이를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마지막 보너스 선물. 하워드 라인골드는 'Net Smart'를 소셜미디어 리터러시란 과목의 교재로 쓸 예정이라고 한다. 뉴미디어 강의를 하시는 분들은 라인골드의 강의계획서를 살펴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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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게이 브린 구글 공동창업자는 지난 4월15일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폭탄선언을 했다. 웹의 자유가 그 어느 때보다 위협받고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당시 그는 "폐쇄된 정원(walled garden) 정책을 주도하는 애플 같은 업체들 때문에 웹의 자유가 위협받고 있다"고 주장해 논란을 불러왔다. 


파문이 커지자 "웹의 자유를 위협하는 것은 애플 같은 업체가 아니라 정부의 검열 때문"이라고 부가 설명을 했다. 하지만 브린이 작심한 듯 애플의 정책을 비판한 것은 결코 우발적으로 나온 말은 아니다. 전략적인 측면이 강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어떤 부분 때문일까? 잘 아는 것처럼 구글의 출발점은 검색이다. 세상 곳곳에 흩어져 있는 콘텐츠를 시의적절하게 찾아주는 게 구글의 경쟁력이다. 당연히 구글 입장에선 웹에 장벽이 쳐지는 것에 대해 혐오감을 나타내지 않을 수 없다. 담장 너머에 있는 콘텐츠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건 구글에겐 엄청난 손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팀 버너스 리가 웹을 창시할 때 기본 정신도 '개방'과 '공유'였다.


그런데 최근 모바일 시대, 더 정확하게는 앱이 새로운 콘텐츠 소통 수단으로 떠오르면서 이런 부분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앱은 대표적인 'Walled garden'이기 때문이다. 어떤 앱이 있는 지는 검색할 수 있지만, 앱 안에 어떤 콘텐츠가 있는 지는 잘 알 수가 없다. 


최근 들어 앱 검색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는 건 이런 상황과 무관치 않다. 최근 애플에 인수된 촘프를 비롯해 앱스파이어, 앱포리셔스, 그리고 Xyologic 같은 업체들이 대표적이다. 야후도 최근 앱 검색 서비스를 선보였다.


그런데 검색전문 사이트인 서치엔진랜드가 앱 검색업체 중 경쟁력이 뛰어난 퀵시(Quixey)를 소개하고 있다. 퀵시를 전 세계에서 유통되고 있는 앱의 80% 이상을 찾아준다고 한다. 


서치엔진랜드 기사에 따르면 퀵시가 다른 앱 검색엔진들과 차별화되는 건 바로 '내용'까지 알려준다는 점이다. 앱 검색 뿐 아니라 기능 검색까지 수행하기 때문에 단순히 앱을 찾고 목록화해주는 정도에 머무는 다른 앱 검색엔진들과는 차별화된다는 것이다. 앱에 어떤 콘텐츠가 담겨 있는 지도 알려준다. 




따라서 퀵시 이용자는 특정 앱이나 앱 카테고리 대신 하고자 하는 작업을 검색해 볼 수도 있다. 서치엔진랜드는 '프랑스어 학습(learn french)'이란 키워드를 입력한 결과를 보여준다.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부가 설명들까지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필요한 앱을 좀 더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퀵시는 구글의 직접 경쟁자를 자처하진 않는다. 하지만 특정 앱을 찾거나, 앱 콘텐츠를 검색하는 덴 구글보다 좀 더 효과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앱 콘텐츠에 대한 부가 정보는 개괄적이긴 하다. 그렇긴 하더라도 지금까지 봐 왔던 앱 검색엔진에 비해선 상당히 유용한 편이다. 


다시 서치엔진랜드 기사를 좀 더 읽어보자. 퀵시는 지난 2009년 설립됐으며, 지금까지 약 400만달러 가량을 투자금을 유치했다고 한다. 흥미로운 건 퀵시 투자자 중엔 에릭 슈미트 구글 전 최고경영자(CEO)도 포함돼 있다는 점이다. 


물론 HTML5 시대갸 본격적으로 열리게 되면 폐쇄적인 앱 세상은 막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퀵시 같은 앱 검색 전문업체에겐 다행스럽게도 적어도 아직까지는 HTML5 세상은 조금 멀어보인다. 퀵시가 앱 영역에선 구글을 대신하려는 야심을 버리지 않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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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는 '1%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전체 사용자 중 독창적인 콘텐츠를 생산하는 비중은 1%에 불과하며, 리트윗을 하는 등의 방식으로 콘텐츠 유통에 기여하는 비중은 9% 수준이라는 것. 따라서 콘텐츠 유통에 일정 정도 기여하는 비중이 전체의 10%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게 '1% 법칙'의 골자다. 


그럼 나머지 90%는? 그냥 '눈팅'만 하는 사람들이다.



SNS에서는 1% 법칙(혹은 1/9/90법칙)이 진리로 통했다. 실제로 적극 참여하는 사람들의 비중이 그다지 높지 않다는 전제 하에 이런 전략을 짰던 것이다.


물론 1% 법칙은 과학적인 근거로 도출된 것은 아니다. 추론에 가까운 법칙이다. 하지만 실제로 SNS를 운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상당히 그럴듯하게 받아들여졌다.


최근 영국의 BBC방송이 이런 가정을 정면으로 뒤집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BBC 연구팀이 조사한 결과 영국 네티즌들은 77%가 '적극 참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BBC는 이 같은 변화의 이유를 '예전보다 참여하는 것이 훨씬 수월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예전에는 기술적인 장벽 때문에 참여 비중이 낮았지만, 이젠 선택의 문제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BBC는 그 근거로 "연구 결과 참여에 소극적이었던 23% 중 10%는 얼리어답터였다"고 주장했다. SNS나 인터넷 토론에 적극 참여할 능력은 있지만, 참여하지 않기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BBC의 이번 연구는 네티즌들의 참여를 실제로 분석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더구나 전체 이용자 중 77%가 '적극 참여'하고 있다는 부분은 상당히 눈에 띄는 결과가 아닐 수 없다. SNS를 중심으로 한 마케팅이나 미디어 운영자들에겐 고무적인 결과이기도 하다.


당연히 "과연 그럴까?"란 질문이 뒤따르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대해 기가옴은 "잘못된 접근"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우선 BBS가 1% 법칙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1% 법칙은 전체 인터넷에 대해 일관된 패턴을 도출하려는 것이 아니라, 특정 온라인 커뮤니티나 서비스에서 기대할 수 있는 참여의 정도를 개략적으로 서술한 것일 따름이란 게 기가옴의 반박이다.


그런 관점에서 기가옴은 "77%에 이르는 사람들이 특정 순간, 특정 서비스에서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고 반박하고 있다. 이를테면 특정 사람이 트위터에선 적극 활동하면서 '1%'에 속하지만, 메타필터 같은 다른 사이트에선 침묵하는 90%에 속할 수도 있다는 것이 기가옴의 반박이다. 그도 아니면 위키피디아에서는 적극적으로 편집자로 활동하지만, 인스타그램에서는 그냥 사진을 훑어보는 쪽에 속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기가옴의 반박을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특정 서비스가 아니라, 그냥 두루뭉수리하게 '적극 참여하느냐'고 묻게 되면 당연히 높은 비율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 이를테면 나한테 누군가가 "인터넷에서 적극 참여합니까?"라고 묻는다면, 페이스북은 적극 이용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확률이 높다는 것. 또 사진 올리는 걸 즐기는 사람 역시 '그렇다'고 답할 가능성이 높고. 


결국 100명이란 모집단을 대상으로 연구했는데, 실제로 그들이 활동하는 모집단을 합하면 그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얘기가 된다. 


BBC의 연구 결과는 '사과와 오렌지를 비교하는' 오류에 빠졌다는 것이 기가옴의 주장이다. 기가옴은 이 기사에서 BBC 라디오1 사례에선 '1% 법칙'이 그대로 적용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물론 '1% 법칙'이란 것도 엄밀히 말해선 과학적인 연구의 결과는 아니다. 따라서 정색을 하면서 논쟁을 할 사안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BBC와 기가옴 간의 논쟁에선 웬지 기가옴 쪽에 좀 더 신뢰가 간다. 아무리 양보를 하더라도, 77%가 적극 참여 네티즌이란 BBC의 연구 결과엔 선뜻 동의하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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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글은 중앙대 대학원 신문에 기고한 하이퍼텍스트 관련 글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대학원 신문(http://www.cauon.net/news/articleView.html?idxno=18096)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0세기 문학의 중요한 이슈 중 하나는 ‘의식의 흐름’을 포착하는 것이었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나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같은 작품들은 선형적인 사건의 흐름보다는 인간 내면세계를 그려내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들의 영향을 받은 많은 작가들은 겉으로 드러난 시간 순서를 무시한 자유 연상적인 글쓰기를 선보였다.

인간의 의식을 포착한 글쓰기에 관심을 보인 것은 비단 작가들뿐만이 아니었다. 하이퍼텍스트 이론가들 역시 자유 연상에 바탕을 둔 비선형적인 글쓰기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특히 ‘제너두 프로젝트’를 통해 거대한 문서 우주를 구축하는 것에 관심을 보였던 테드 넬슨은 1960년대에 ‘하이퍼텍스트’라는 신조어로 이런 상황을 묘사했다. 넬슨은 하이퍼텍스트에 대해 독자에게 다양한 선택의 기회를 마련해주는 ‘비순차적 글쓰기(non-sequential writing)’로서, 상호작용성을 구비한 컴퓨터 스크린에서 가장 잘 읽힐 수 있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이런 특징을 갖고 있는 하이퍼텍스트는 링크를 기반으로 한 네트워크 구조로 구성되어 있어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도 서로 손쉽게 연결될 수 있는 확장성을 지니고 있다. 이에 따라 하이퍼텍스트에서는 단일한 중심이라는 개념이 자리를 잡기 힘들다. 책에서 본문과 각주의 자리바꿈 현상으로 나타내는 것이 그 한 예다. 본문에 부차적인 요소로 각주가 따라붙는 종이책과 달리 하이퍼텍스트에서는 각주가 텍스트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각주가 일반화된 것’이라고 볼 수있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독자들이 덧붙인 각주도 저자의 텍스트와 같은 지위를 누릴 수 있게 된다. 조지 란도는 이런 점을 들어 하이퍼텍스트가 독자와 작가 간의 경계를 흐리게 하며, 궁극적으로는 바르트가 이야기했던 이상적인 텍스트의 또 다른 특징을 실례로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쓰기 텍스트, 독자에게 권위를 넘기다

바르트는 일찍이 텍스트를 ‘읽기 텍스트’와 ‘쓰기 텍스트’로 나눴다. 읽기 텍스트는 독자가 그저 읽도록 만들어진 책을 의미하며, 쓰기 텍스트는 독자들이 직접 쓰도록 유도하는 텍스트를 의미한다. 읽을 수는 있지만 쓸 수는 없는 것이 읽기 텍스트라면, 무언가를 읽은 뒤 자신의 의견을 덧붙일 수 있는 것이 바로 쓰기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저자와 독자 간에 엄격한 장벽이 가로 놓여 있던 시기에는 쓰기 텍스트라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뭔가를 ‘쓰는 것’은 저자에게 부여된 고유한 권리라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산자와 수용자를 가로막고 있던 장벽이 허물어지면서 이러한 상황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 저자의 일방적인 글쓰기보다는 독자와의 상호작용이 훨씬 더 중요한 요소로 대두되고 있다. 특히 하이퍼텍스트는 저자의 권위 중 일부를 독자에게 이양하는 방식으로 저자와 독자 간의 평준화를 이끌어내며, 이로 인해 하이퍼텍스트에서는 저자와 독자 간의 공동 작업이 쉽게 이뤄지고 있다.

하이퍼텍스트 공간의 능동적인 독자들은 자신이 선택한 텍스트의 특정 판본을 생산할 때 필연적으로 저자와 협력 작업을 하게 된다. 어떤 문서든 하이퍼텍스트 환경에 나타나는 순간 좀 더 거대한 시스템의 일부로 존재하게 되며, 따라서 그 시스템에 있는 다른 자료와 관계를 맺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주도하는 사람 없이 모든 사람들이 저자 역할을 하는 경지까지 발전하기도 한다.

최근 인터넷 환경을 곰곰이 살펴보면 바르트가 이야기했던 쓰기 텍스트가 실제로 구현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하이퍼텍스트를 기반으로 하는 인터넷 미디어에서 공동 작업의 개념이 확산되면서 뉴스의 생산자와 수용자, 기자와 독자 간의 구분이 조금씩 무력해지고 있다. 그런가하면 트위터를 비롯한 각종 소셜 미디어들은 아예 모든 사람들이 저자가 되는 새로운 저널리즘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는 불특정 다수의 일반인들이 공동 저자 역할을 하면서 전문 저널리스트의 영역에 도전할 기회가 생겼기 때문에 가능하다. 지난해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이란 대선이나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 시위 때 블로그 및 UCC사이트를 통해 행해졌던 수많은 보도 활동들이 바로 그 예다. 이렇게 인터넷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뉴스뿐 아니라 댓글이나 카페, 토론방 같은 곳의 콘텐츠까지 저널리즘의 대상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확대되면서 저널리즘에서도 쓰기 텍스트라는 개념이 가능하게 됐다. 특히 블로그 같은 1인 미디어에서의 읽기는 쓰기와 직접 연결되어 ‘쓰기로서의 읽기(reading-as-writing)’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네트워크로 연결된 블로그는 존재하는 텍스트를 취한 뒤 여기에 무언가를 덧붙이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이런 방식으로 의견이 덧붙여진 블로그는 트랙백을 통해 능동적 독자의 텍스트와 연결되고, 그것에 통합시킴으로써 토론을 계속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이런 현상은 바르트가 말한 쓰기 텍스트를 실제로 구현했다는 의의를 지닌다.

독자의 참여와 새로운 성찰의 계기

‘읽기’에서 ‘읽고 쓰기’로의 전환은 수용자의 권력 변화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읽기만 가능한 시스템에서 독자들이 발휘할 수 있는 권력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텍스트의 읽기 순서를 정하는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반면 하이퍼텍스트에서는 쓰기까지 가능하게 됨에 따라 저자에게 집중됐던 권력이 수용자에게 분산되면서 이른바 권력의 탈중심화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변화가 과연 문학 작품의 한계를 극복하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을까. 질문을 던지는 것은 쉽지만 이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볼터가 지적한 것처럼, 독자들은 ‘쓰기 활동에 함께 참여하라’는 저자의 요구를 부담스럽게 받아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독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하이퍼텍스트 소설 실험이 마이클 조이스의 <오후>를 비롯한 몇몇 작품들 외에는 이렇다 할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 역시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하이퍼텍스트로 인해 현실화된 ‘쓰기 텍스트’가 몰고 온 변화의 바람은 소중하다. 이미 저널리즘을 비롯한 많은 영역에서 생산자들이 독점하던 권력 구조 자체를 흔들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수동적으로 읽기만 했던 많은 사람들이 생산 욕구를 불태우면서 새로운 여론 형성의 장이 열리고 있다. 문학이라는 특수한 영역이라고 해서 이러한 변화의 바람이 불지 말란 법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권력을 내놓으라’는 하이퍼텍스트의 요구 자체가 저자들에게 새로운 성찰의 계기를 제공해 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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