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부쩍 '글쓰기'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 '논문식 글쓰기의 폐해'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물론 그 이유는 단순하다. 내가 조만간 박사 논문 심사를 받아야하기 때문이다.

얼마전 Y대 도서관에서 박사 논문을 한 편 구해 정독했다. 꽤 관심있는 주제였고, 또 무엇보다 내 논문 주제와 관련이 있었기에, 정말 '안광이 지배(紙背)를 철(徹)할 정도'로 열심히 읽었다.

하지만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비문(非文) 투성이인데다, 문장 또한 엄청나게 길어서, 두 번 세 번 읽어도 그 의미가 잘 들어오지 않았다. 좀 심하게 얘기하자면, 어설픈 번역문을 읽는 느낌마저 들었다.

문제는 학술논문을 읽다보면 이런 '어설픈 글쓰기'가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 정갈하고 깔끔하게 쓴 글로 구성된 학술논문을 만나는 것은, 첫 미팅 나가서 한 눈에 쏙 들어오는 파트너를 만나기 만큼이나 힘들다.

물론 학술논문이라는 것이 인용과 각주가 모듬회처럼 얽혀있기 때문에 깔끔한 이음새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고 읽더라도 정제된 글쓰기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연구자'가 드문 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중에 교수신문에 게재된 문체비평 : (1) 에세이스트 고종석이란 글을 발견했다. 이 글 속에 있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참 많이 공감했다. '이름 값'을 걷어내고 나면, 상당수 학자들은 '정제되지 못한 글쓰기'란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건 어쩌면 문학 평론가들도 예외는 아닐 듯 싶다.
 

端雅는 깔끔하고(端正) 부드럽고 곱다(優雅)는 뜻이다. 고종석은 프랑스에서 언어학을 공부했고 정확한 문장을 구사한다. 그는 교수들을 비판할 때가 종종 있는데 비문투성이인 논문을 자주 예로 든다. “국어학자들도 정확한 우리말을 구사하지 못하며” 그나마 “정과리와 백낙청이 비문이 없다”라고 말한다. 이런 언어에 대한 자의식은 고교시절 아는 형에게 배운 스페인어, 대학 때의 불어원전읽기 동아리, 신문 기자, 프랑스 유학 등을 거치며 점점 단단해지며 글의 분위기를 결정짓는 요소로 자리 잡는다. 거기에 차거나 모자람을 잘 조절하는 테크닉이 더해져서 깔끔하고 우아한 한국어 문장이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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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코드 훔치기> 출간 직후 썼던 서평입니다. 이런 묵은 글들을 하나 둘 옮겨올 계획입니다.

1980년대의 화두는 민주화였다. 당시엔 군부독재를 물리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유보할 수 있다는 게 지배적인 분위기였다. 아니, 이렇게 말하는 건 온 몸으로 그 시대를 견뎌낸 사람들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처사일 수도 있겠다.

조금 현학적인 표현을 쓰자. 그 시절을 지배한 것은 이른바 거대담론이었다. 개인보다는 민족이나 국가같은 거창한 것들이 우선하던 시대였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 때도 여전히 개인은 소중했다. 단지 쉽게 표현하지 못했을 뿐, 결국 중요한 것은 '나'이니까.

고종석이 '개인들의 시대'란 글을 통해 "개인들이 돌아오고 있다"고 진단했을 때 느끼는 진한 가슴떨림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고종석(이런 표현이 가능할 진 모르겠다. 난 그를 한번도 만난 적 없고, 하다 못해 전화 통화 한 번 한 적 없다. 단지 내가 그를 접한 건 10여권에 이르는 그의 책을 통해서일 뿐이다)은 조직의 시대에도 "여전히 개인은 소중하다"고 외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진정한(?) 자유주의자다. 지향점은 다르지만 '자유주의'란 화두로 그와 동류에 놓을 수 있는 인물로는 언뜻 김훈과 복거일 정도가 떠오를 뿐이다. (언젠가 고종석은 "복거일과 김병익을 사사하고 있다"고 밝힌 적 있다.)

'코드 훔치기'는 자유주의자 고종석의 21세기 산책이다. 모 일간지에 '모색21'이란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을 모은 이 책은 21세기를 정확하고 세세하게-물론 저자는 산만하고 성글었다고 겸양을 떨고 있지만- 톺아 보겠다는 고종석의 야심이 엮어낸 한편의 걸작이다.

저자는 머리말을 통해 "모색도 부분적으로 전망이다. 모색이 일반적 전망과 다른 것은 그 속에 의지나 욕망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고 고백한다. '코드훔치기'는 바로 그 욕망의 결정체다.

이 책을 관통하는 일관된 주제는 개인주의와 개인의 부활이란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고종석의 개인주의는, 흔히 연상하듯 고립주의와는 멀찍한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휴대폰과 노트북을 든 현대의 노마드(nomad)들은 인터넷이나 통신망이란 형태를 통해 쉼없이 타인과 교신한다. 지구 문명의 망 속에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주의나 이기주의는, 말 그대로 다르다.

이러한 개인주의에 바탕을 둔 고종석의 세상 읽기는 파격적이다. 물론 그 파격이 자리하고 있는 바탕엔 개인이란 가치가 놓여 있다.

이를 테면 그가 '왜 마리화나를 피워선 안되는가' 라고 되물을 때 그의 목청엔 '자유의 한계'에 대한 불만이 가득 녹아 있다.

"마리화나를 가두는 것은 우리 사회에 별 도움이 안되면서 개인들의 자유를 억압함으로써 사회의 활기와 행복의 총량을 줄일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나름의 타당성을 충분히 지닌다. 동의하고 안 하고는 그 다음의 문제다.

이런 시각에서 그는 동성애나 소수 민족에 대한 차별 문제에 대해서도 불편한 심정을 감추지 않는다.

고종석의 '코드 훔치기'는 인문사회학적인 프리즘으로 그려낸 21세기 정보화사회론이다.인터넷과 컴퓨터란 획일적(?) 프리즘에 싫증이 난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색다른 시각으로 접근해 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현학적인 글에 알레르기를 느끼는 사람이라면 아예 접하지 않는 게 좋다. 그 만큼 이 책엔 서양의 온갖 논리와 학설들이 난무한다. '현학'이란 것이 고종석의 장점이자, 때론 단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연세대 김철 교수는 고종석에게서 '인간과 세상에 대한 안쓰런 애정'을 읽은 적 있다. 그 애정의 바탕에 깔린 것이 바로 개인주의에 대한 남다른 사랑과 관심이다.

'많은 좌파를 부끄럽게 만들 줄 아는 충실한 우파'인 고종석의 세상 읽기를 통해 21세기를 느껴 보자. 아니 21세기를 애무해 보자. 코드가 통하기만 한다면, 고종석이 느낀 오르가즘에 동참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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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고인의 <말들의 풍경>을 펼쳐보았다. 이 평론집에 묶인 글들을 쓸 때, 고인은 내 나이였다. 그런데도 그 언어는, 절망스러워라. 내가 한 생애를 더 산 뒤에도 다다를 수 없을 셈세함과 아름다움으로 무르익어 간다. 김현이 살아 있었을 때, 그의 글을 읽는 것은 내 오롯한 즐거움이었다. 그가 산 생애만큼을 거의 살고 보니, 이젠 그 즐거움 저 밑바닥에서 질투의 쓴 맛이 배어 나온다. 그가 지금 60대의 선배 글쟁이라면, 내게 이따위 질투심 같은 것은 생기지 않았으리라. 내겐 이것만 해도 그가 더 오래 살았어야 할 이유로 충분하다.  고종석 <말들의 풍경> 중에서.

고종석의 글은 참 웅숭깊다. 그 글의 맵시가 그렇고, 또 그 안에 담긴 내용이 그렇다.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늘, 촘촘하고 빼곡하게 채워넣은 상자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기분을 느끼곤 한다.

일면식도 없는 저자에게서 남모를 친근함을 느끼는 것은, 내가, 그의 글을, 빼놓지 않고 읽어왔기 때문일 터이다. 고종석이 김현에게 느낀 그 질투를, 나는 고종석의 글들을 읽으면서 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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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가 고종석에게 느끼는 또 다른 부러움은 바로 '프리랜서로 살아가는 법'이다. 잘 나가던 문화부 기자 생활을 접고 프랑스로 홀연히 유학을 떠난 이래, 그는, 더 이상, 한 직장에 얽매인 삶을 살지 않고 있다. 이른바 프리랜서인 것이다.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한국에서 프리랜서란 '자유직'이란 허울 좋은 단어보다는, '비정규직'이란 또 다른 단어와 훨씬 더 닮아 있다는 것을. 그리고, 프리랜서들 중에서도, 특히, 글로 밥벌이를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고종석의 만만찮은 다산성은, 프리랜서라는 그의 신분과도 무관하지 않을 터이다. 실제로 그는 어떤 책의 서문에서 IMF 이후 프랑스에서 '비자발적으로' 귀국하면서, 어쩔 수 없이 청탁을 거절하지 못해 '많은 글들'을 썼다고 고백한 적 있다.

하지만 고종석의 다산성은, 그가, 적어도, 출판업자들에게서 '신뢰'를 얻고 있다는 점을 반증해 준다. 내가 부러운 것은 바로 그 부분이다. 프리랜서로서 상품성이 있다는 점. 그리고 그 상품성에 걸맞은 글들을 쏟아내고 있다는 점. (물론 그만큼 경제적인 반대급부가 따라오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 역시도 '프리랜서'를 꿈꾸었던 적 있다. 아니, 지금도 자주, 프리랜서를 꿈꾼다. 현재의 내 직업을 썩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걸 필생의 업으로 삼을 생각은 별로 없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가끔, 아니 자주, 과감하게 프리랜서로 돌아서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아마, 나도, 언젠가는, 지금과는 다른 일을 하면서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이, 내가 막연하게 꿈꾸듯, 연구자의 삶이 될 지, 아니면 고단한 프리랜서의 삶이 될 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 둘 중 어떤 것이 되든, 적어도, 그에 걸맞은 '내실'을 다져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물론 내가 내실이라고 했을 때는, '체제의 법칙' 내지는 '격식'에 충실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적어도 고종석에게서 맡을 수 있는,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어야 겠다는 다짐이다.  

또 다시 서두가 무지하게 길었다. 얼마전 고종석의 <말들의 풍경>이란 책을 구입했다. 책 표지에 보니, 이 책이 저자의 열 여덟번째 저서 쯤 되는 것 같다. 그 중 내 서재에 없는 책은 네 권 쯤 되는 듯하다. 그 중 두 권은 읽은 뒤 누군가에게 선물로 줬으니, 실제로 그의 저서 중 내가 손을 대지 않은 것은 두 권뿐이다. 이쯤되면 대단한 애독자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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