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영화 보는 걸 썩 내켜하지 않는 반면, 영화를 소재로 울궈먹는 건 좋아한다. 그러다보니 가슴으로 영화에 몰입하는 경우는 드문 편이다. 대개는 "저거 어디에 써 먹을 수 없을까?"란 불순한 의도를 갖고 영화를 뚫어지게 '쳐다' 본다.

안성기, 박중훈 콤비가 오랜 만에 손발을 맞췄다는 '라디오 스타'도 내겐 그렇게 다가온 영화 중 하나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 난 이 영화를 한 자리에 앉아서 끝까지 본 적은 없다. 언젠가는 시간을 내어서 볼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췌해서 본' 이 영화는 UCC와 소통, 그리고 교감이란 면에서 참 많은 것을 내게 안겨줬다.

영화가 시작되고, 약 45분 쯤 흐를 때쯤 박중훈은 방송 사고를 낸다. 뭐, 원래 의욕없이 방송을 하던 그였으니, 사고랄 것도 없겠지만, 어쨌든, PD나 제작자들 입장에서 '방송 사고'였다. 역전앞 다방(?)의 김 양에게 마이크를 넘겨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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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 파악 제대로 못하는 김 양. 마이크 잡은 김에 외상 값 갚지 않은 사람들에게 독촉 멘트를 시원하게 날려준다. 그리곤 자기의 솔직한 심정을 담아, 멀리서 기다리고 있을 '엄마'에게 사랑 고백을 한다. 이 때 밖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다. (여기서 얼치기 문학도 흉내를 내자면, 영문학에서 물(비) 같은 것들은 죽음과 재생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다. 영화나 소설 같은 곳에서 결정적일 때 꼭 비가 오는 건, 분위기 탓도 있지만,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영원회귀 본능'에 호소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김 양의 이 방송은 의외로 영월(?)이란 소공동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게 된다. 이 때부터 박중훈은 'UCC의 위력'에 눈을 뜨게 된다. 브레히트가 얘기했던 라디오의 대안적 성격을 유감 없이 활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난 '라디오 스타'란, 색 바랜 책갈피 같은 영화를 UCC와 시민 저널리즘의 소중한 이상을 담고 있는 영화라고 내 마음대로 해석해버리기로 했다. (이준익 감독이 이 얘길 들으면, 펄쩍 뛸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감독의 손을 떠나는 순간,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바로 관객이다. 그게 시민 참여 미디어와 영화의 공통점이라고 생각한다.)

'라디오 스타'에서 주인공(박중훈)이 DJ로 재기할 수 있었던 건 형식 파괴 때문이 아니라, 청취자와 소통하는 방송을 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수용자의 욕구를 잘 건드려줬기 때문이란 애기와도 통한다.

UCC와 시민 참여란 기치를 내건 온라인 미디어들은 '라디오 스타'와 브레히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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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히트는 내게 '극작가' 이미지 보다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란 시를 남긴 시인으로 더 친숙하다. 1990년대였던가? 박일문이란 작가가 쓴 동명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 소설보다는 소설 끝부분에 붙어 있던 브레히트의 시에 더 진한 가슴떨림을 느꼈던 기억이 새롭다.

하지만 최근 나는 브레히트를 뛰어난 '시민 저널리즘 이론가'로 새롭게 만나게 됐다. 그의 '라디오 이론'은 이미 수 십 년 전에 요즘 웹 2.0을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얘기하는 '콘텐츠 생산자로서의 소비자'란 개념을 만들어내고 있다.

브레히트는 새롭게 등장한 미디어인 라디오에 주목하면서 "라디오와 같이 상호작용적이라는 기술적 잠재력을 갖고 있는 미디어는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적인 구조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브레히트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라디오는 공공 생활에 중요한 커뮤니케이션 기구로 생각될 수 있다. 그것은 대단한 통로 체계이다. 만일 라디오가 단순히 전달할 뿐만 아니라 수신도 할 경우, 다시 말해서 청취자가 듣기만 할 게 아니라 말할 수 있게 하고, 그리고 그들을 소외시키지 않고 자신들의 관계망 안에 끌어들일 경우 라디오는 대단한 커뮤니케이션 도구가 될 수 있다.
                            박춘서, <대항공론과 대안언론>. p. 38에서 재인용.
브레히트는 라디오에서 '쌍방적 미디어'의 가능성을 발견했던 것이다. 평범한 시민들이 적극 참여하는 미디어. 모두가 주인이 되는 미디어. 많은 이들은 인터넷의 등장에서, 더 '경박한' 사람들은 웹 2.0이란 말 속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하지만 시민 미디어, 양방향적 미디어에 대한 고민은 이미 그 이전부터 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독자가 기자가 될 수 있는 시민 미디어의 가능성에 대한 고민은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이다.

브레히트는 '플랫폼'만 펼쳐놓으면 '누구나 훌륭한 기자가 될 수 있는' 시민 저널리즘 세상이 펼쳐질 것이란 섣부른 기대에 대해서도 일침을 놓고 있다. 특히 요즘 '웹 2.0이 모든 걸 해결해 줄 것'이란 과감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한번쯤 들어볼만한 지적이다. 역시 그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자.


사람들은 갑자기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졌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숙고하면 그는 말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박춘서. 앞의 책.  p. 37


여기까지 쓰고 보니, 내가 <블로그 파워>에 첨가했던 구절이 떠올랐다. 그래서 서둘러 그 부분을 찾아봤다. 그 부분에서 나는 맥루한과 댄 길모어를 인용한 뒤 이런 구절을 덧붙여 놓고 있었다.


라디오는 참여라는 측면에서 볼 때 전통 매체 중 블로그와 가장 흡사한 것으로 평가된다. 하워드 쿠르츠처럼 '라디오가 블로그 현상의 전조가 됐다.'는 과감한 주장을 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는 아닐테지만, 적어도 블로그 세계의 장점 중 상당 부분은 이미 라디오가 한 차례 누렸던 것들이라는 점은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블로그는 라디오의 많은 장점들을 좀 더 발전시켰다는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김익현, <블로그 파워> p. 55.

<블로그 파워>를 쓸 때만 해도, 나는 브레히트의 '라디오 이론'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 아니 내가 꽤 좋아하는 시인이, 사실은 뛰어난 미디어 이론가였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못했다. 큰 맥락에서보면 그리 틀리지 않았던 것 같아 다행이긴 하지만, 그 책을 쓸 때 내가 브레히트의 '라디오 이론'을 알았더라면 좀 더 풍부한 서술이 가능했을 것이란 아쉬움까지 비켜갈 수는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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