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1.

지난 6월 조선일보는 82쿡닷컴 운영진들에게 공문을 한 장 보냈다. 이 사이트를 중심으로 조선일보 광고 중단 요구운동이 확산되자 조선일보가 일종의 '협박 공문'을 보낸 것이다. 정치적인 성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던 순수한 요리전문 사이트인 82쿡닷컴이 졸지에 첨예한 논쟁의 중심지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이후 82쿡닷컴 회원들은 조선일보 앞에서 기자 회견을 열고 거리 행진을 하는 등 자신들의 의견을 적극 표현했다.

장면2.

촛불 시위 중 한 여성이 전경으로부터 무차별적으로 군홧발 세례를 받고 있다. 이 장면이 고스란히 담긴 '군홧발 짓밟힌 여성, 서울대 음대생’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은 포털 사이트의 카페와 개인 블로그를 타고 순식간에 확산됐다. 이 동영상은 많은 시민들을 서울시청 앞 광장으로 불러 모으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긴 꼬리'의 힘이 유감없이 발휘된 대표적인 사례였다.


2008년 여름 대한민국을 뒤흔드는 '촛불 정국'은 미디어 지형도에도 엄청난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다. 블로그나 카페, 게시판 등이 새로운 여론의 중심으로 떠오르면서 이제 미디어 시장에서도 조직의 시대가 가고 개인의 시대가 오고 있다는 것을 실감케 하고 있다. 82쿡닷컴을 중심으로 한 조중동 광고 중단 운동이나 군홧발에 밟히는 여성을 찍은 동영상은 누군가 연출해서 만들어진 풍경이 아니다. 그냥 평범한 개인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표출한 것이 시발점이 되면서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다. 평범한 개인들이 자연스럽게 내는 목소리들이 한 데 뭉치면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런 풍경은 춧불 집회가 계속되면서 더욱 더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다음의 아고라를 비롯한 각종 인터넷 토론방과 게시판, 그리고 블로그와 카페 등은 더 이상 단순한 커뮤니티 에 머무르지 않고 있다. 이들은 사회의 여론을 주도하는 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공론장으로 떠오르고 있다. 촛불 정국의 여론을 주도하면서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주류 언론들의 기득권까지 위협하고 있다.

일찍이 하버마스는 18세기 영국과 프랑스에서 널리 유행한 카페와 살롱을 중심으로 한 토론 문화를 통해 '공론장(public sphere)'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여론의 담지자로서의 공중’들이 주축을 이룬 공론장은 사적 개인들의 단순한 친목 모임이 아니다. 공론장은 주권의지를 지닌 사적 개인들이 모여 스스로의 의지를 표현하는 공개된 장소이다. 하버마스는 공론장에 대해 '공중으로 결집한 사적 개인들의 공간'이라고 평가했다.

하버마스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의 공론장은 ‘신분에 따른 특권 의식이 작용하지 않으며, 누구나 참여하며, 토론 주제에서도 성역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었다. 즉 하버마스는 공론장에 대해 첫째, 토론을 통해 형성되며 둘째, 이전에는 배제됐던 많은 사람들이 참석할 수 있는 새로운 토론 공간이며 셋째, 발화자의 사회적 신분이 아니라 그 내용의 장점에 따라 평가되는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블로그나 카페를 중심으로 한 의제 설정 과정을 살펴보노라면 하버마스가 이야기했던 공론장을 떠올리게 하는 측면이 많다. 무엇보다 이곳에는 토론 주제의 성역이 존재하지 않는다. 또 이전까지만 해도 공적인 여론 형성 과정에서 소외됐던 일반 시민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 게다가 이 공간에서는 발화자의 신분보다는 그 내용이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보자. 한 동안 다음의 아고라를 중심으로 진행됐던 '이명박 탄핵 서명' 운동을 주도한 것은 ID ‘안단테’로 유명한 한 고등학생이었다. 그가 주도했던 탄핵 서명 운동은 순식간에 아고라 전체 공간으로 퍼지면서 서명자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중요한 것은 탄핵 서명이란 내용이었지, 그 운동을 누가 주도했느냐가 아니었던 것이다.

‘4대강 정비계획은 대운하’라고 폭로한 ‘김이태 박사를 지킵시다’ 서명운동 역시 다음 아고라를 중심으로 자연발생적으로 진행돼 불과 사흘 만에 4만5000명이 참여했다. 누군가 주도했다면 이런 식의 여론 형성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양상은 '웹 2.0'으로 대표되는 참여와 개방 시대를 맞아 더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소수의 '논객'들이 온라인 공간의 여론을 주도했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아고라에는 10대 청소년부터 30, 40대 아줌마에 이르기까지 여론의 흐름에서 소외됐던 사람들이 주도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이버 공간에서도 '논객'의 시대가 가고 '이웃'이 여론을 주도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블로그, 카페, 게시판 등은 특히 처음 이슈를 제기한 사람과 추가적으로 이슈를 확대 발전하는 사람들이 한 공간에서 활동한다는 점이 기존 언론과 다른 점이다. 말하자면 생산자와 수용자가 구분되지 않는 구조인 셈이다. 특히 생산소비자(prosumer)들로 구성된 블로그 공간에서는 이런 모습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과정에서 블로그는 링크와 트랙백 같은 대화 기제를 중심으로 여론을 확대 재생산한다. 일종의 '네트워크 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 블로그 공간의 힘은 바로 '연결성'에서 나온다. 이런 연결성을 빼놓고는 블로그 공간의 폭발적인 의제 확산 과정을 설명하기 힘들다.

통상적인 저널리즘 과정에서는 2차적 이슈 제기 과정이 1차적 제기자들과는 다른 공간에서 이루어지거나, 저널리즘 영역 바깥에서 발생하게 된다. 이를테면 전통 저널리즘의 시각으로 접근할 경우엔 뉴스를 소재로 한 토론이나, 댓글 공간에서의 공방 같은 것들은 저널리즘 활동으로 간주하기 힘들었다. 부차적으로 행해지는 활동이었을 따름이다. 하지만 블로그를 기반으로 한 뉴스 공간에서는 1차적 이슈 제기 과정과 2차적 이슈 제기 과정이 같은 공간에서 이루어질 뿐 아니라, 둘 다 같은 비중으로 간주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이슈를 확산하고, 또 재생산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블로그나 카페, 토론방 같은 곳에서의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여론에 대해 배후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구시대적인 접근법이 아닐 수 없다. 모두가 배후가 될 수도 있는 곳이 바로 블로그나 카페 공간이기 때문이다. 때론 엉뚱한 방향으로 가동되긴 하지만, 인터넷 공간에서 가동되는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이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물론 블로그나 카페, 토론방 등의 의제 설정 과정이 항상 건강한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특정한 여론이 확대 재생산되는 여론 쏠림현상의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는 곳이 바로 인터넷 공간이다. '리퍼블릭닷컴(Republic.com)'이란 저술로 유명한 썬스타인(Sunstein)은 인터넷 공간의 여론 쏠림 가능성에 대해 일찍부터 경고했다. 실제로 인터넷 공간은 경우에 따라선 노일레 노이만이 이야기했던 '침묵의 나선 이론'이 더 극단적으로 가동될 위험성도 안고 있다. 몇몇이 특정 여론을 '도배'해 버릴 경우엔 대다수의 건전한 사람들이 그 공간을 떠나버릴 수도 있다.

따라서 '사이버 공론장'으로 큰 기대를 모으고 있는 블로그나 카페, 토론방 등이 건전한 여론 형성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이런 부분에 대해 각별하게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몇 년 전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줄기세포 조작 사건 당시 여론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브릭(Bric)은 사이버 공론장의 모범으로 삼을 수 있다. 당시 브릭에서 제기된 이슈가 기존 언론 매체로 흘러들어가는 역의제설정(reverse agenda setting) 현상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공간에서 토론의 규칙을 잘 지킬 수 있었던 덕분이다.

하버마스는 공론장을 이야기하면서 부르주아들의 높은 교양 수준을 그 조건으로 제시했다. 최근 사이버 공론장으로 떠오르고 있는 블로그나 카페가 지금보다 좀 더 신뢰받는 공간으로 자리매김 하기 위해서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도 눈을 돌려야 할 것이다. 뻔한 얘기인 것 같지만, 참가자들의 '커뮤니케이션 능력(communication competence)'이 뒷받침 되지 않을 경우엔 진정한 공론장 역할을 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선 '양화가 악화를 구축'할 수 있는 토론의 규칙을 정비해 나가는 것이 꼭 필요할 것이다.

* 한국언론재단에서 발간되는 월간 <신문과방송> 8월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신문과방송>은 8월호에서 '인터넷, 공론장인가 갈등의 장인가'란 특집 기획을 마련하고 이상길 연세대 교수, 임종수 세종대 교수, 황용석 건국대 교수 등의 글을 실었습니다. 이 글도 그 기획 중 하나로 게재된 겁니다. 자세한 내용은 <신문과방송>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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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블로그와 SNS 2008.04.13 09:50
<빈 집>
            -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문득, 기형도의 시 <빈 집>이 떠올랐다. 요즘 내 블로그가 꼭 빈 집같은 느낌이 들었던 탓이다. 이것 저것 날 귀찮고 힘들게 하는 것들이 많아, 도무지 블로그 관리가 안된다.

그 중 가장 힘들게 하는 건 역시 논문. 없는 시간 쪼개서 쓰려니 도무지 진도가 안 나간다. 게다가 번역. ㅠㅠ. <하이퍼텍스트 3.0>의 깊이에 압도당했다. 요즘. 1200매 가량 번역했는데, 아직 온 길의 두 배는 더 가야할 듯 하다.

그러다 보니 회사일과 대학 강의 등은 우선 순위에서 한참 밀려버린 느낌. (물론 실제로 밀어놨단 얘긴 아님. 당사자들, 오해 마시길. ㅎㅎ)

결국 블로그에 글 올리는 일은 6순위 쯤에 자리잡고 있는 듯하다. 언제쯤 '빈집 증후군'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그건 나도 모르겠다. 주인장이 외면하는 통에 손님들마저 뚝 끊어져 버리니, 진짜 빈집 같아 으스스한 느낌마저.

책 선전 겸해서 보너스 샷 하나 더 추가한다. 블로그파워의 3대 원천 중 하나라고 강조했던 '링크'를 설명하면서, 엄청나게 오버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1980년대말 스물아홉이라는 젋은 나이에 요절했던 시인 기형도는 '빈 집'이라는 아름다운 시를 남겼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로 시작해 "그리운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란 멋진 문구로 끝나는 이 시는, 누구나 가슴 한 쪽에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짜릿한 옛 사랑의 추억을 건드리면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 역시도 어디선가 빌어왔을법한 '빈집'이란 모티브는 그와 동시대를 살아갔던 많은 이들에게 짜릿한 문학적 감동을 선사했다.

시인 기형도가 죽은 지 몇해 뒤, 비슷한 또래의 소설가 신경숙은 '빈집'이란 단편소설을 한 편 썼다. 기형도 추모 작업의 일환으로 쓰여진 그 소설은 기형도의 시 '빈집'의 산문적 패러디였다. 신경숙이 '빈집'이란 소설을 썼을 때, 빈집을 모티브로 한 문학적 지형도에서 기형도와 신경숙은 서로 링크된 셈이다. 
                                                                  <블로그파워> 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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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들이 블로그에 올린 글은 '개인 의견'일 뿐일까? 저널리즘 활동과는 관계가 없는 사적인 행동일 뿐일까?

언뜻 생각하면 간단한 듯한 질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이 말처럼 간단하지만은 않다. 어떤 형식의 블로그냐에 따라 대답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느닷없이 기자 블로그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최근 불거진 나훈아 괴담 때문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나훈아 씨의 기자회견이 있고 난 뒤 있었던 각종 일들 때문이다.

좀 더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자. 이번 소문의 진원지는 한 기자의 블로그 였다고 한다. 그 기자가 자신의 블로그에 "모모 씨가 어쩌고 저쩌고"라면서 올린 글이 확대되면서 괴담으로 확산됐다고 한다.

그리고 나훈아 괴담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던 그 기자는 PD수첩과의 인터뷰를 통해 "(소문이) 너무 터무니 없으니까 신문에는 다루지 못하지만, 블로그에는 그런 개인의 의견들은 쓸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기자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글을 올린 것이란 얘기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기자 블로그의 정체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됐다.
(개인이라 할 지라도 자신의 블로그에 남의 명예를 훼손할 가능성이 있는 글을 올릴 땐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는 점은 논외로 하기로 하자.)

이 대목에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기자가 개인 블로그에 올린 글은 '개인 의견'에 불과한 것일까? 적어도 신문 기사를 쓸 때와 같은 자기 검열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난 이 질문에 대해 절반은 예, 절반은 아니오라고 대답하고 싶다.

우선 자기 검열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부분. 일단 형식적인 면에서는 당연히 그렇다. 기사 문법을 굳이 따를 필요가 없다. 아니 따르지 않는 것이 좋다고 본다. 신문에 글을 쓰듯 일방적으로 사실을 전달하기 보다는, 양방향적인 소통을 염두에 둔 글쓰기를 하는 게 좋다는 얘기다.

하지만 내용 면에서는 '아니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정말로 "블로그에는 그런 개인의 의견을 쓸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면, 그건 굉장히 위험한 발상이라고 본다. 더구나 문제가 됐던 그 기자가 운영하는 블로그는 해당 매체의 기자 블로그 중 하나인 것으로 알고 있다.

적어도 이 정도 블로그라면 '준 저널리즘 행위'란 생각을 갖고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대학교 교수가 해당 대학 사이트에 자신의 홈페이지를 운영하면서 "개인적인 공간이라 내 생각을 올렸을 뿐"이라면서 "대학 교수인 나의 지위와는 관계없는 얘기"라고 하면 인정할 수 있겠는가?

적어도 기자 블로그임을 명확히 할 경우에는 사적인 공간이란 생각은 버리는 게 좋다는 것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본인이 아무리 사적인 공간이라고 우겨도, 독자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언론사들이 운영하는 기자 블로그가 활성화되지 않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시스템적인 부분, 기자들의 업무 부담, 등등 그 이유는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 중 하나로 나는 "블로그는 사적인 공간일 뿐"이라는 생각도 크게 작용한다고 본다. 공적인 기자 생활을 보완해줄 수 있는 매체라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블로그를 운영하는 시간 자체가 아깝고 귀찮게 여겨지게 마련이란 얘기다.

이 부분은 길게 얘기할 것 없을 것이다. 모범적인 기자 블로그 운영자 몇 명만 벤치마킹 해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의 블로그가 왜 활성화되고, 또 똑 같이 바쁜 그들이 어떻게 기자 블로그를 잘 운영할 수 있는지 말이다.

나훈아 사건을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연예 저널리즘에 대해 한 마디씩 하고 있다. 그러니 나까지 나서서 한 마디 거들 필요는 없을 듯하다.

하지만 블로그에 대한 부분은 꼭 짚고 넘어갔으면 한다. 특히 기자 블로그에 대한 부분. 난 장기적으로는 인터넷 언론은 기자 개인 블로그들의 집합체로 진화 발전해 나갈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사회가 전문화 파편화 되면서 언론사 브랜드 못지 않게 개인 브랜드가 중요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자들도 블로그의 정체성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해야 한다고 본다. (이 얘기는 앞으로 다시 할 기회가 있을 듯하여, 이 정도로 끝낸다.)

이번 사건을 보면서 바로 그 대목이 아쉬웠다. 기자 블로그에 대한 인식 부족. 아니 더 정확하게는 '블로그'란 미디어에 대한 천박한 인식. 이런 인식을 빨리 벗어던지지 않으면, 요즘 언론들이 갖다 붙이기 좋아하는 '웹 2.0 시대'의 인터넷 저널리즘은 아직도 저 먼 곳에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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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블로그는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공론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대화와 토론을 통해 새로운 공론을 도출하는 숙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를 구현하는데 중심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선스타인(C. Sunstein)의 'Republic.com 2.0'은 이런 질문에 대해 다소 비관적인 대답을 내놓고 있다. 이른바 여론 쏠림 현상으로 인해 오히려 기존 인식이 더 극단적으로 치닫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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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잠시 공론장(public sphere)에 눈을 돌려보자. 잘 아다시피 하버마스는 17, 18세기 프랑스와 영국 등에서 유행한 카페와 살롱에서 '신분에 구애 받지 않는 토론문화'의 진수를 발견한다. 그는 카페와 살롱을 중심으로 한 토론문화 연구를 통해 저 유명한 '공론장 이론'을 도출하게 된다.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토론에 참석할 수 있으며, 그 동안 금기의 영역에 있던 주제까지 토론하는 공간'이란 공론장 개념과 함께 '이상적 담론 상황'이란 하버마스의 주장들은 이후 민주적인 토론 문화를 연구하는 많은 이들에게 교과서 역할을 해 왔다.

물론 하버마스는 '공론장의 재봉건화'로 이상적 담론 상황이 사라졌다고 주장한다. 특히 자본주의의 발달, 그로 인한 광고의 영향력 확대 등으로 성역 없는 토론이란 사실상 무의미해져 버렸다는 것이 하버마스의 주장이다.

이런 가운데 인터넷, 특히 블로그의 등장으로 '새로운 공론장'의 부활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누구나 매체를 소유하는 1인 미디어 시대가 도래하면서 성역 없는 토론이 가능하게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선스타인은 'Republic.com 2.0'을 통해 '여론 쏠림 현상'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이를 위해 그는 그 동안의 연구 결과들을 원용한다. 블로고스피어의 '링크'는 주로 '끼리 끼리(like-minded)' 이뤄지고 있다는 것. 따라서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의 토론을 통해 합의를 도출하는 숙의 민주주의가 현실화되기 보다는, 자신이 이전에 갖고 있던 생각을 더 극단적으로 몰고 가는 현상이 더 자주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이런 실험을 한 적 있다고 한다. 공화당 지지자들끼리 모아놓고, 또 민주당 지지자들끼리 모아놓은 결과 보수적이었던 사람은 더 보수적으로, 진보적 성향의 사람은 더 진보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최근 블로고스피어를 보면서 선스타인의 주장이 틀리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과학적으로 분석해 본 것은 아니지만, 언뜻 보기에도 여론 쏠림 현상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게다가 운영자가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1인 미디어의 특성상 반대되는 의견이 지속적으로 올라올 가능성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반대되는 다양한 의견들을 접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그런데 블로고스피어에서는 자신과 반대되는 의견은 아예 접하지 않으려고 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 선스타인의 주장이다. 이른바 파편화(fragmentation)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게 꼭 메타블로그 사이트 운영자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는 아니지만) 올블로그나 미디어다음 블로거 기자 운영진들은 혹시 이런 문제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해결책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 본 적 있을까? 다양한 담론을 담아낸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을 듯하여, 괜히 한번 걱정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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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하버마스의 공론장과 숙의 민주주의, 그리고 블로그의 관계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대화의 복원'이란 관점에서 블로그를 살펴보려고 한다. 구어 뉴스 시대 이후 실종됐던 대화가 블로그를 통해 400년만에 복원됐다는 가설. 이 가설을 어떻게 증명해야 하나 고민 중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Republic.com 2.0'이란 책을 주문했다. 저자인 선스타인(C. Sunstein)은 다소 생소한 이름이긴 하다. 이 책을 사게 된 건 '블로그의 복수(Revenge of blogs)'란 부제가 눈길을 끈 때문이다.

또 하나. 선스타인이란 저자가 이 책의 1판인 'Republic.com'에서 가상공간의 여론 쏠림현상에 대해 지적했다는 얘기에 관심이 가기도 했다. 인터넷이 거대한 공론장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란 기대감을 정면 반박한 주장. 하버마스가 이야기했던 공론장의 재봉건화, 내지는 공론장의 파편화 현상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는 주장은 아닐까, 란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 동안 블로그 미디어에 대한 연구들은 전통 매체나 포털들과의 차이점을 규명하는 데 주력했다. 물론 그 자체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 접근할 수 없을까'란 고민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다보니, 가장 만만한 것이 역시 하버마스였다. 그래서 난 지금 공론장과 숙의 민주주의. 그리고 블로그 미디어의 가능성 같은 키워드들을 부여잡고 있다.

이 책 외에 최근 구입한 책들:

1. 프랭크 웹스터(2007). <정보사회 이론>(개정판). 나남.
2. 위르겐 하버마스(2000). <사실성과 타당성>. 나남.
3. 윤영민(2000). <사이버공간의 정치>. 한양대학교 출판부.
4. Y. Benkler(2006). <The Wealth of Networks>. Yale University Press.
5. S. Allan(2006). <Online News>. Open University Press.
6. 최민재(2007). <동영상 UCC와 저널리즘>. 한국언론재단.
7. 조한혜정 외(2007). <인터넷과 아시아의 문화연구>. 연세대학교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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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기자클럽과 블로터닷넷이 공동 주최한 '2007 블로그 미디어 포럼' 행사에 발표자로 참여했다.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분들이 준비한 행사인지라, 발표 자료를 준비하면서도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꼭 친구 결혼식 축가 순서를 배정받은 느낌이었다.(참고로 나는 한번도 결혼식 축가를 불러본 적이 없다. 적어도 내 노래 솜씨를 아는 사람은, 축가는 고사하고, 중창단에 참여하는 것도 꺼릴 것이다.)

"잔치 분위기에 누가 되면 안될텐데, 뭔가 의미 있는 얘기를 해야 할텐데."란 생각이 계속 나를 괴롭혔다. 발표 시작하기 직전까지 긴장을 했던 것도 이런 부담감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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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블로터닷넷]



어쨌든 행사는 '잘' 끝났다. 나는 '대화의 복원'이란 관점에서 블로그 미디어의 의미에 대해 얘기했다. 이건 내가 요즘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하버마스의 공론장과 블로그를 한번 연결해보자는.

'뉴스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지금 우리가 접하는 방식. 즉 기자들이 기사를 쓰고 독자들이 일방적으로 읽는 방식이 절대 진리는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하버마스가 '공론장(public sphere)'이라면서 그리도 감탄했던 18세기의 살롱, 카페 문화를 지탱한 것은 바로 대화였다.

하버마스가 정리한 공론장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위계질서가 없었다. 한 인간으로서 대등한 자격을 갖고 서로 토론에 임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발화자의 신분이 아니라, 내용에 따라 토론의 향방이 결정됐다. 지금이야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 귀족 주도 사회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건 거의 혁명이다. (그 당시 평민이었던 소설가 스탕달이 살롱 문화를 통해 스타로 떠올랐다는 것은 굉장히 유명한 이야기다.)

둘째, 사실상 토론의 성역이 없었다.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그 동안 교회와 국가의 권위로 보호받던 많은 주제들에 대한 토론과 공방의 여지가 생기게 됐으며, 그 역할을 담당한 것이 바로 커피하우스와 살롱이었다.

셋째, 토론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개방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공중들은 토론하면서 자신의 폐쇄성을 벗어던지고 대중 속으로 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이날 발표한 내용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바로 이런 것이다. 신문이란 대중매체가 등장하면서 뉴스에서 실종됐던 대화가 블로그를 통해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게 됐다는 것. 그런 점에서 언론이란 관점으로 접근할 경우엔 블로그가 바로 21세기의 공론장이라는 것. 그런 점을 주목하자는 게 내 발표의 요지였다.

발표를 끝내면서 "블로그는 그만 잊자. 사실 블로그가 별거냐?"고 얘기했는데. ㅎㅎㅎ. 내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했는 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난 웹 2.0이니, 롱테일이니, 하는 '용어들의 홍수'를 굉장히 싫어하는 편이다. 블로그 역시 용어들의 홍수 속에 빠져버리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다.)

서명덕 님께서 '블로그는 기성 뉴스에 없던 대화 복원한 것' 이란 제목으로 발표 요지를 잘 정리해준 것 같다. '까칠한' 블로거들이 던질 예리한 비판이 두렵기도 하지만, 그 또한 '생산적 대화'라고 생각하기에 '묘한 기대감'이 생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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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3년 <인터넷신문과 온라인 스토리텔링> 출간 이래 댓글에 많은 관심을 가져 왔다. 인터넷 저널리즘에서 중요한 것은 독자 반응이고, 그 독자 반응 중에서 정수는 기사에 붙은 댓글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댄 길모어 등의 용어를 빌린 것이긴 하지만, 나는 이 같은 상황을 '대화 저널리즘(journalism as a dialogue)'이란 말로 표현했다. 악플 공세 때문에 다소 약해지긴 했지만, 이런 믿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난 요즘 댓글만 보면 기겁을 한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댓글이 많이 붙은 기사들을 볼 때면 한숨이 나온다.

사연은 이렇다. 요즘 '박사 논문 초치기' 작업을 하고 있다. 당장 한 달 뒤까지 논문을 완성해야 하는 상황인데도, 아직 이렇다 할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다. 그 동안 회사 일로 바빠서 논문 작업에 손을 제대로 대지 못한 때문이다.

최근 블로거들의 기사를 분석하고 있는 데, 분석 항목 중 댓글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다 보니 댓글이 100개를 넘는 기사를 만날 땐 한숨부터 나오는 것이다. 당연히 표본이 많으니 좋아해야 마땅하련만 사정은 말처럼 간단하지만은 않다.

최소한 500개 기사는 분석해야 하는 데, 만약 한 기사당 댓글이 100개씩 붙어 있다면 5만개의 댓글을 일일이 읽고 분석해야 한다는 얘기다. 5만개. 이걸 혼자서, 그것도 퇴근 이후 틈틈이 읽어서 한 달만에 분석하는 게 가능할까?

그러다 보니 댓글이 없는 기사를 만나면, 웬지 공짜로 먹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좋다.

그래서 일과 유희는 다른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두껑 보고도 놀란다'고,  올 가을엔 댓글만 보면 가슴이 벌렁거릴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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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래 아이들이 한 데 모여서 공부하는 제도(즉 학교)가 인류 역사 이래 불변의 진리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잘 아다시피 우리나라에서 대중 교육이 일반화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눈을 세계 역사로 돌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C. 브론테의 <제인 에어>나 스탕달의 <적과 흑> 같은 곳에 보면 가정 교사라는 게 당시 귀족층의 일반적인 교육 방식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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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생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대부분 직장이 없다는 것에 대해 상당히 조바심을 내고, 또 불안해한다. 또 실제로 불안해 하는 게 당연하다. 사업을 하는 어떤 선배는 "그래도 새경 받을 때가 속 편했다"고 하소연하기도 하는 걸 보면, 직장생활이라는 게 경제적인 안정감을 주는 역할을 하는 건 분명한 듯 하다.

하지만 직장에 매여서 돈벌이를 하는 생활 역시 그리 오래된 풍속은 아니다. 한국이야 1970년대 중순까지도 농경사회였기 때문에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세계적으로도 똑 같은 장소에 모여 똑 같은 일을 하면서 월급 받아먹는 생활을 한 게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지 싶다.

홀름 프리베 등이 지은 <디지털 보헤미안>은 "직장을 떠나라, 그 너머에 더 나은 삶이 있다"고 부르짓는 책이다. 더 이상 정규직에 얽매이지 말고 좀 더 자유롭게 일하며 풍요롭게 살고 싶다면 디지털 보헤미안의 삶을 주목하라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이 책 저자들은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전일제 근무는 예나 지금이나 이 특수한 형태의 충성심을 이끌어내는 가장 좋은 수단이다. 왜냐하면 매일같이 여덟시간 또는 그 이상을 한 회사 내에서 일하는 사람은 회사에 동화되지 않을 수 없을테니까 말이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사장이 하는 농담을 더 이상 비웃지 않게 되며, 오히려 그것이 재미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회사의 규칙과 업무 스타일이 완전히 피와 살 속으로 파고 들어가서 마치 제2의 천성처럼 되어버리는 것이다. (66쪽)

기본적으로 저자들의 관점은 이런 주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시장으로 직접 들어가라"는 게 이 책 저자들의 주장인 것이다. 이런 주장이 보기에 따라선 다소 과격한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나처럼 '직장'이란 우산 속에 들어가 있어야 마음이 놓이는 사람들에겐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도 적지 않다.

하지만 아날로그 보헤미안들이 한정된 유통망 때문에 힘든 예술적 삶을 영위해야만 했던 것과는 달리, 디지털 보헤미안들은 인터넷이란 무한 유통망을 갖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그만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꼭 이 책 때문만은 아니지만 요즘 나도 디지털 보헤미안을 꿈꾼다.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는 직장생활이 지겹고 무미 건조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게 보헤미안적인 기질이 있는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여건만 되면 과감하게 버리고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정규직을 버리고 디지털 보헤미안의 생활을 감행하라는 저자들의 꼬임에는 다소간 방어막을 치고 대처했다. 하지만 시대가 디지털 보헤미안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원론에는 전폭적으로 지지를 보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저자들은 블로그에 대해서도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 중 한 구절을 소개한다.


블로그라는 세상에 발을 들여놓으면 마치 술집, 광고탑 그리고 소도시 신문들이 뒤섞여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때로는 어느 공공 포스터에 게시된 공격적인 선언문 아래서 기분 좋은 술집에서 몽롱하게 취한듯한 느낌으로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 속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리고 그 술집 안에 있으면 바깥의 넓은 세상 속에 펼쳐진 잡다한 것들이 모두 걸려들어 안으로 들어오며 밖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주변에 대해 더욱 폭넓은 정보를 얻는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2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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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블로깅을 하면서 느끼는 재미 중 가장 큰 것을 꼽으라면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이다. 특히 댓글과 트랙백을 통해 다른 이들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게 참 재미있다. 올블로그에 마련돼 있는 '블로고스피어에서는 지금'이란 코너도 그런 점에서 자주 찾는 곳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차에  재미없는 zlinx.net 님이 쓴 왜 블로거들은 댓글을 잘 달지 않을까? 란 재미 있는 글을 읽었다. 사실 나도 늘 생각하던 것 중 하나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왜 블로거들은 내 글에 댓글을 잘 달지 않을까?'란 문제에 관심을 가진 적이 적지 않다. (사실 내 블로그 뿐 아니라, 내가 쓴 기사들에도 댓글이 거의 없는 편이다. 누가 그랬던가? 악플보다 더 서글픈게 무플이라고. ^^)

일단 내 블로그에 댓글이 적은 것은 재미없는 zlinx.net 님이 제시한 대로라면, 5)방문자 수가 적다,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그다지 재미 있는 이야기를 쓰는 것도 아니니, 뭐, 댓글을 달고 자시고, 할 것도 별로 없긴 하다.

이런 넋두리를 하기 위해 댓글 얘기를 꺼낸 건 아니다.

사실 내가 더 관심을 갖는 건 댓글의 수가 아니라 질이다. 정작 더 문제는 댓글이 많고 적음에 있는 게 아니라, '어떤 댓글이냐'는 데 있다는 얘길 하고픈 것이다. 곰곰히 살펴보면 상당수 댓글들은 '맞다' 내지는 '말도 안되는 소리 마라' 정도로 구성돼 있는 것 같다.

물론 댓글 공간을 통해 공감을 표하는 게 중요한 소통 수단이긴 하다. (그 가치를 폄훼하자는 게 아니니, 오해들 마시길. 나같은 중소형 블로그들은 '공감한다' 그 한 마디에 큰 힘을 얻으니까. ^^) 하지만 블로고스피어가 '이슈 중심적인 공간'이라고 가정하자면, 정작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이슈에 대해 토론을 하고 논쟁을 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그런데 블로고스피어에는 단편적인 '배설'은 많지만, 그것들이 함께 연결되는 토론이 드물다는 것이다. (특정 키워드를 둘러싼 공방은 물론 많다. 하지만 그건 꼭 블로고스피어가 아니더라도 활발하다. 또 상당수 공방들은 특정 키워드를 사용한 '방문자 유입'을 노린 측면이 강한 느낌도 든다.)

댓글이란 게, 오프라인 공간으로 치자면 일종의 토론 수단이 될 것이다. 따라서 나는 댓글이 드물거나, 특히 토론 내지 논쟁이라고 할만한 댓글이 드문 것은 바로 우리가 제대로 된 토론문화를 공부할 기회가 없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건 재미없는 zlinx.net 님이 1)번과 4번)으로 제시한 것과 비슷한 듯하다.)

블로고스피어를 보면 자극적인 비난은 많은 데, 잔잔한 토론을 드문 듯하다. 이를테면 '디워'를 둘러싼 공방 역시 감정은 앞서고, 이성은 뒷전으로 밀린 듯한 느낌이 강하다. 하지만 그건 블로고스피어만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디워 공방>을 벌이고 있는 평론가들 역시 토론보다는 직설적인 비난을 앞세우는 쪽이 많은 듯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댓글의 빈약(수, 량 측면 모두)은 그 근원을 블로고스피어에서 찾을 문제는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보다는 '토론문화가 실종된' 우리 사회의 근원적인 문제와도 연결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얘길하고보니, 꼭 '근본으로 돌아가자'는 뻔한 얘기를 되풀이한 것 같아서 좀 그렇다. 하지만 블로고스피어에서나, 현실에서나, 이를테면 애정을 밑바탕에 깐 진지한 비판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그건 비판을 하는 쪽이나, 비판을 당하는 쪽이나, 다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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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s 님이 쓴 집단지성에 대한 회의 란 글을 읽었다. 짧은 글이고, 또 약간은 넋두리성의 글이긴 했지만, 그래도 한번쯤 생각해 볼만한 거리를 던져준 것 같다.

발단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발생한 한국인 23명 피랍사건이다. 나 역시도 이 사건과 관련해 인터넷 공간에 올라오는 글들을 보면서 가슴 답답한 느낌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필로스 님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 대해 적지 않게 공감했다.

도무지 나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비이성적이고 폭력적인 글들이 블로고스피어를 지배하고 있다. 현재 블로그코리아의 자동편집기능(실시간 인기태그+인기글 조합 표현)을 활용한다면 '죽으려고 갔으니 죽어라'는 글이 블로그코리아의 메인 페이지를 장식할 것이다.
이걸 막고, 주말 내내 좀더 이성적인 글들이 올라오기를 기다렸던 나는 메타블로그 운영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인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용자들의 판단에 맡겨 놓는 것이 메타블로그의 정신에 맞는 일일까.

나 역시 최근 들어 이런 회의를 많이 갖고 있다.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일을 하다보니, 네티즌들의 '광기어린(?)' 비판에 직면할 적이 적지 않다. 특히 이제 막 기자 생활을 시작하는 후배들은 네티즌들이 무심코 던지는 돌들에 적잖은 상처를 받고 있는 걸 자주 본다.

그저께였던가. 같은 팀의 후배가 '다이하드 4.0'이란 영화를 본다기에, 컴퓨터 보안 관점에서 그 영화에 대해 한번 써보라는 미션을 줬다. 물론 쉽지 않은 소재이고, 잘못하다간 크게 비판당할 우려가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 크는 것 아닌가, 란 생각에 빨리 쓰라고 재촉을 했다.

그리고 며칠 뒤.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하고 취재한 기사가 출고됐다. 거기에 내가 살을 좀 붙여서 출고했다. 이 기사가 포털에 나간 뒤 네티즌들이 온갖 비판을 쏟아댔다. 주로 '기자 바보 아니냐'는 것이 네티즌들의 주장이다. 또 내가 '프리즌 브레이크' 얘기를 약간 덧붙였는 데, 그 부분이 오류가 있었던지, 바보 같은 기자라는 '폭언(이 정도는 폭언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 갓 글을 쓰기 시작한 사람에겐 엄청난 상처를 안겨주는 말이다.)'을 해댔다.

나는 그 동안 인터넷 공간에선 네티즌들의 자율적 정화 기능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이걸 집단 지성에 대한 믿음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인터넷 공간, 더 정확하게는 포털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면 '집단지성'과는 거리가 멀다.

왜 그럴까? '집단지성'이란 설정 자체가 잘못된 것일까?

곰곰히 생각해보던 난, "인터넷 공간에도 참여 장벽이 있다"는 쪽으로 잠정적인 결론을 내려 버렸다. 집단지성이 가능하려면 '누구나 참가'해야 하는 데, 인터넷 공간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아니 이게 무슨 말? 이라고 할 지 모르겠다. 내가 여기서 얘기하는 건 '가능성'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인터넷은 당연히,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공간이다. (인터넷과 컴퓨터의 혜택을 볼 수 없는 사람을 빼면. 이 문제도 상당한 장벽이긴 하지만, 일단 논외로 하자.)

하지만 '가능성'이 있다는 것과, 실제로 참여한다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일전에 포털 쪽에서 일하는 사람으로부터 "공감할 수 있는 기사보다는, 공분을 불러 일으키는 기사가 더 파급력이 크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다.

바로 그 부분에서 '집단지성'이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것 아닐까? 즉 '공분'(이란 표현은 너무 점잖고, 직설적으로 화를 내는, 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까?)에 가까운 글을 쓰는 사람들이 훨씬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다보니까, 전반적으로 필로스 님이 걱정하는 것 같은 현상이 생기는 것 아닐까?

그래서 나는 '집단지성은 절대로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집단지성이 발휘될 수 있는 시스템을 계속 고민하고 만들어내야 한다는 말이다. 특히 메타블로그 사이트 같은 곳에선 이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게 집단지성의 밑거름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비유는 어떨까? 한국 부자들에 비해 미국 부자들이 '사회 환원'에 훨씬 더 적극적이다. 상속세를 낮추겠다는 부시 행정부를 대대적으로 비판하고 나선 것도 바로 '부자'들이다.

그들이 왜 그럴까? 물론 도덕성을 갖추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뿐일까? 단지 미국 부자들이 한국 부자에 비해 더 도덕적이기 때문일까? 난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사회의 시스템이라고 믿는다.

(잘은 모르지만) 미국에선 기부를 제대로 하지 않는 기업은 '탐욕스런 기업'으로 찍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바로 불매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대권 주자들 역시 '탈세 차원'이 아니라 '수입에 비해 납득할 만한 기부를 하지 않았을 경우'엔 결정적인 결격 사유가 된다. 이게 바로 사회 시스템이다. 이런 시스템이 가동되는 사회에서 어린 시절부터 자라왔기 때문에 '부자의 도덕성'도 자연스럽게 몸에 밴 것이다.

글이 두서 없이 길었다. 필로스 님의 '집단지성 불신론'에 대해서는 전폭적으로 공감한다. 당연히 그냥 놔두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메타블로그 사이트가 어려운 것 아닐까? 메타블로그에 글을 보내는 사람들이 '집단지성'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게 꼭 감시시스템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정말 납득할만한 당근이 있다면, 그것 역시 시스템을 만들어낼 수 있을 테니까?

따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용자들의 판단에 맡겨 놓는 것이 메타블로그의 정신에 맞는 일일까."란 마지막 독백에 대해서는 "아니요"라고 말하고 싶다.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사람들이 수동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 자동으로 구현되는 시스템.

(이런 진단에 대해 무책임하다고 할 지 모르겠다. 나도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할 순 있지만, '어떤 시스템'인지는 모르겠기 때문이다. 또 솔직히 말해, 내가 필로스 님 입장이라면,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식의 '뻔한 얘기'를 들으면 엄청나게 화가 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호흡 강한 걸음'으로 차근 차근 정진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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