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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번역하고 있는 책이다. 조지 랜도우의 <Hypertext 3.0>. 감히 하이퍼텍스트 분야에선 최고의 명저라고 적극 추천하고 싶은 책. 최근 출판사와 계약을 끝냈다. (아직 계약서는 받지 못했지만.)

현재 100쪽 가량 번역했는 데, 목표는 연내로 출간하는 것이다. 잘 될진 모르겠지만, 자투리 시간 쪼개어서 열심히 번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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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언론재단에서 발간되는 <신문과방송> 2월호에 기고한 원고입니다. 해외 언론명저 다이제스트 코너이지요. 웹과 하이퍼텍스트에 관심있는 분들께는 <하이퍼텍스트 3.0>은 정말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조지 랜도우는 미국의 대표적인 ‘하이퍼텍스트 이론가’로 꼽히는 학자다. 브라운대학 영문학 교수인 그는 지금으로부터 17년 전인 1990년에 ‘하이퍼미디어와 문학연구(Hypermedia and Literary Studies)’란 책을 엮어낸 것을 신호탄으로 ‘하이퍼텍스트(Hypertext)’ ‘하이퍼/텍스트/이론(Hyper/Text/Theory)’을 잇달아 엮어내면서 하이퍼텍스트 이론화 작업에 한 발 앞서갔다.

지난 2006년 출간된 ‘하이퍼텍스트 3.0’은 ‘지구화 시대의 비평이론과 뉴 미디어’란 부제를 달고 있다. 10년 전인 1997년 ‘하이퍼텍스트 2.0’의 부제로 ‘현대 비평이론과 테크놀로지의 수렴(The convergence of contemporary critical theory and technology)를 선택했던 그는 이번에 출간한 3판에 ‘지구화’라는 단어를 덧붙이면서 10년 세월 동안 변화된 인터넷 환경을 묘사하고 있다.

링크로 경계를 넘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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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도우는 이 책 서문을 통해 ‘하이퍼텍스트 3.0’을 내놓게 된 것은 웹의 엄청난 성장세와 ‘읽고 쓰기(read-write) 하이퍼텍스트인 블로그의 발전, 그리고 플래시 등을 활용한 애니메이션 텍스트에 대한 관심 증가 등을 담아내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런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하이퍼텍스트 3.0’를 통해 저자는 읽기, 쓰기와 함께 링크(link)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는 아예 “웹이 발전하면서 적극적인 읽기가 한층 활기를 띠게 됐다. 이에 따라 우리는 직접 쓰기를 원하는 독자들의 모든 작품들이 출판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6쪽)”고 주장하고 있다. 이 같은 적극적인 읽기의 밑바탕에는 하이퍼텍스트의 최대 강점인 링크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저자인 랜도우의 생각이다.

링크는 작가와 독자, 선생과 학생 간의 경계뿐 아니라 한 텍스트와 다른 텍스트 사이의 경계를 이동시키고 있다. 특히 링크는 작가, 텍스트, 작품, 읽기에 대한 우리들의 경험에 혁명적인 효과를 부여한다. 하이퍼텍스트가 궁극적으로 독자와 저자 간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들어준다면,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링크라는 것이다.

링크를 기반으로 한 ‘적극적인 읽기’라는 관점에서 랜도우가 관심을 갖는 것은 바로 블로그다. 블로그 독자들은 네트워크로 연결된 컴퓨터 환경에서 글을 쓰기 때문에 의견이 덧붙여진 블로그(commented-on blog)는 트랙백을 통해 적극적인 독자의 텍스트에 연결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토론을 계속할 수 있게 된다(7쪽).

블로그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읽고 쓰기’ 텍스트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랜도우는 이 같은 질문에 대해 “다른 형태의 글쓰기나 인쇄물에 비해 독자들에게 더 많은 힘을 부여해 주는 것”이라는 대답을 내놓는다.

블로그는 두 가지 형태의 하이퍼텍스트 성을 채용한다. 첫째, 토론방 리스트와 달리 모든 블로거들은 연대기적으로 먼 개별 글들을 서로 링크할 수 있다. 따라서 독자들이 사건들에 맥락을 부여할 수 있으며, 글쓴이들이 또 다시 설명을 해주지 않아도 모든 이야기를 접할 수 있게 된다.

하이퍼텍스트의 적극적 독자 만들기

두 번째 특징은 독자들이 블로그의 글들에 논평을 달 수 있는 블로그 시스템으로 인한 것이다(77-78쪽). 블로그는 특히 하이퍼텍스트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블로그 형식은 넬슨, 반 담 등 많은 하이퍼텍스트 선구자들이 형상화한 적극적인 작가-독자라는 관념을 웹 상에서 처음으로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조지 랜도우는 이처럼 블로그에서 볼 수 있는 완벽한 읽기-쓰기 텍스트(read-write text)는 탄압적이고 획일적인 목소리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56쪽). 일부 블로거들이 외부의 논평을 차단하거나 제한하려고 해도 결국 구글을 비롯한 검색 엔진을 통해 만 천하에 드러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저자의 힘을 제한하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랜도우는 ‘읽기 쓰기 텍스트’인 하이퍼텍스트가 소극적인 독자들을 적극적인 독자로 바꾸어 놓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이퍼텍스트는 페이지 형식으로 묶여진 책에서는 불가능한 상호텍스트성을 구현할 수 있다. 이 같은 상호텍스트성은 다양한 목소리를 한 자리에 모을 수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조지 랜도우가 주장하는 읽기-쓰기 텍스트라는 개념은 요즘 포털들과 각종 온라인 매체들이 금과옥조처럼 받들고 있는 UCC(이용자 제작 콘텐츠)의 이론적 바탕이라고 해도 크게 그르지 않을 것 같다. UCC를 통해 자기 의견을 개진하는 사람들이 랜도우의 ‘적극적인 독자’이며, 이들이 쓰는 글들을 ‘읽기-쓰기 텍스트’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저자와 독자간 권력이동 현상

조지 랜도우는 이 책을 통해 “모든 형태의 하이퍼텍스트는 텍스트와 텍스트성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바꾸어 놓는다(102쪽)”라고 주장한다. 즉 하이퍼텍스트라는 새로운 정보기술은 텍스트성에 대한 우리들의 경험을 재설정할 뿐 아니라 저자와 텍스트의 관계에 대한 우리들의 개념까지 바꿔 놓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필연적으로 여러 가지 비동시적 협업 형태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특히 독자들이 텍스트에 직접 링크를 추가할 수 있도록 완벽하게 네트워크화된 하이퍼텍스트 환경에서는 저자뿐 아니라 편집자도 상당한 힘과 통제력을 잃게 된다(103쪽).

검색을 통해 정보를 찾을 경우에는 적극적인 독자들이 중요하지 않은 정보를 갖게 되거나, 혹은 그 가치를 제대로 결정할 수 없는 정보들을 갖게 되는 경향이 많다. 반면 하이퍼텍스트는 링크 형태로 편집자들이 승인한 연결을 제공하기 때문에 소위 ‘주 텍스트’로부터 같은 텍스트의 다른 경로로 갈 수 있으며, 이와 관련된 설명을 제공해주는 텍스트로도 이동해 갈 수 있도록 해 준다.

조지 랜도우는 하이퍼텍스트 글쓰기가 피카소, 브라크 등과 입체파 화가들의 작품들과 많은 핵심적 특징들을 공유한다고 주장한다. 즉 일종의 콜라주 적인 글쓰기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콜라주 글쓰기에서는 주 텍스트뿐 아니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에까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따라서 새로운 읽기 종류를 만들어내게 되는 것이다. 특히 개별 렉시아(lexia, 개벌 문서 덩어리)의 공간적 배치가 중요해짐에 따라 인쇄 텍스트를 읽는 방식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는다. 그렇기 때문에 하이퍼텍스트 글쓰기를 할 때는 시각적 쓰기까지 감안해야만 한다(195쪽).

적극적인 독자, 심지어는 끼어드는 독자를 만들어내는 하이퍼텍스트는 이런 융합 활동의 완성을 향해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간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데 있어 하이퍼텍스트는 저자의 권한 중 일부를 빼앗아 독자에게 이전해 준다. 저자의 힘을 침범하는 것이다. 저자와 독자 사이의 이런 권력 이동 현상을 통해 하이퍼텍스트가 자동적으로 독자들을 저자와 공동 저자로 만들어준다는 것은 아니다. 하이퍼텍스트 환경에서는 독자들에게 자신들이 읽은 텍스트에 링크나 다른 텍스트를 추가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해주는 것이다.

물론 블로그 같은 읽고-쓰기 하이퍼텍스트라 할 지라도 독자들에게 다른 사람들이 작성한 텍스트를 수정할 권리를 허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이퍼텍스트는 인쇄와 필사본 시대에는 분리돼 있던 개별 문서의 현상학적 거리를 좁혀 주는 역할을 한다. 텍스트의 자치를 줄이는 방식을 통해 하이퍼텍스트는 저자들의 자치권을 줄여 준다(126쪽).

이 같은 관점에서 조지 랜도우는 작가와 독자 사이의 경계는 대부분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때 작가와 독자 사이의 경계 소멸은 작가가 아니라 독자에게 달려 있다. 독자들이 자신들의 논평이나 개인 문서를 만든 뒤 이를 링크하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작가와 독자 간의 분명한 구분이 흐려지기 시작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사라질 위험에 처해 있다(344쪽).

요즘 웹 2.0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면서 ‘개방과 공유’라는 표현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또 네티즌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가 큰 성공을 거두면서 ‘공동작업(collaboration)’이란 말도 힘을 얻고 있다. 집단 지성(collective intelligence) 역시 웹 2.0 담론에서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개념들을 접하면서 그 신선함에 감탄을 한다. 하지만 이 같은 개념들 역시 ‘웹 2.0’이란 깃발을 들고 나온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개방과 공유, 그리고 집단 지성은 인터넷의 모태나 다름 없는 하이퍼텍스트에서 가장 중요한 사상이다.  하이퍼텍스트 이론을 처음 이끌어냈던 바네바 부시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은 ‘열린 우주’와도 같은 거대한 문서 공간을 꿈꾸었던 것이다. 

일상적인 공동작업, 글쓰기의 재설정

조지 랜도우 역시 하이퍼텍스트 상의 모든 글쓰기는 공동 작업이 된다고 주장한다. 공동 작업의 첫 번째 요소는 저자와 독자의 역할을 비교할 때 나타난다. 왜냐하면 적극적인 독자들은 필연적으로 특정 텍스트를 생산할 때 저자와 공동 작업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공동 작업의 두 번째 측면은 저자와 다른 저자들을 비교할 때 나타난다. 즉 지금 시스템 위의 모든 작가들의 가상적 존재와 함께 작업을 하게 되는 것이다(136쪽).

위키피디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한 작가가 원고를 생산하면 다른 사람이 수정, 첨가 등을 통해 편집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으로 이루어지는 공동 작업 방식이다. 특히 인터넷이 생활 속으로 완전히 파고들면서부터는 다른 공동 작업자와 떨어진 곳에서 다른 시간에 이런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137쪽).

이처럼 하이퍼텍스트는 ‘공동 작업’을 일상화하면서 저자에 대한 우리들의 상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하지만 하이퍼텍스트가 바꾸어 놓은 것은 저자에 대한 기본 인식뿐만이 아니다. 아예 글쓰기 자체를 재설정하는 것이 바로 하이퍼텍스트다. 텍스트가 존재하는 방식과, 우리가 그것을 읽는 방식까지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는 미국의 대표적인 집단 지성 사이트로 꼽히는 슬래시닷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슬래시닷에서는 사용자들이 서로 다른 시간에 기고자, 독자, 중재자, 그리고 중재자들의 심판관으로 활동하게 된다(363쪽)”는 점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월드와이드 웹과 인터넷은 정보에 대한 민주적인 접근이라는 위협과 약속을 동시에 갖고 온다. 하지만 정보기술이 문화, 정부, 사회를 어느 정도까지 변화시킬 것인가라는 점은 여전히 열린 질문으로 남아 있다(367쪽)”는 저자의 주장처럼 하이퍼텍스트와 인터넷이 몰고 올 변화의 바람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 혁명이 제대로 뿌리내릴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기술보다 저작권과 재산권이 우선돼야

저자는 이를 위해 필요한 조건 중 하나로 저작권에 대한 개념 변화를 들고 있다. “공동 작업과 공유가 ‘글 쓰기’의 본질인 하이퍼텍스트 작가의 관점에서 볼 때 복제나 링크 같은 행위를 금지시키는 방식으로 텍스트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는 행위는 어리석을 뿐 아니라 부도덕한 제한이다(371쪽)”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따라서 진정한 권력을 가진 하이퍼텍스트를 개발하기 위한 필수 요건 중 하나는 기술이 아니라 저작권과 작가의 재산권에 관한 법을 향상시켜야만 한다.

‘하이퍼텍스트 3.0’은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시대의 미디어에 대해 많은 문제 제기를 하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은 기술보다는 인문학과 콘텐츠적인 측면에서 하이퍼텍스트가 갖는 의미를 고찰하고 있어 지나치게 현란한 정보기술(IT) 관련 이야기에 지친 독자들에게 신선한 자양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문학 이론에 대한 깊이 있는 담론들이 때론 독서 작업을 힘들게 만들 수도 있겠지만, 기술과 콘텐츠의 결합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그 정도 수고쯤은 기꺼이 감당해야 할 것이다.

주로 IT업계 중심으로 웹 2.0이나 하이퍼텍스트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 한국과 달리 미국에서는 조지 랜도우 같은 영문학자들이 상당히 큰 목소리를 내고 있다. 여기서부터 ‘콘텐츠 중심적인’ 미국과 ‘망(network) 중심적인’ 한국의 차이가 나오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해보게 됐다. 이런 생각의 밑바탕에는 요란한 ‘웹 2.0 담론’을 뒷받침할만한 콘텐츠가 제대로 눈에 띄지 않는 우리 현실에 대한 아쉬움이 진하게 담겨 있다는 말을 덧붙여도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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