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1.

지난 6월 조선일보는 82쿡닷컴 운영진들에게 공문을 한 장 보냈다. 이 사이트를 중심으로 조선일보 광고 중단 요구운동이 확산되자 조선일보가 일종의 '협박 공문'을 보낸 것이다. 정치적인 성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던 순수한 요리전문 사이트인 82쿡닷컴이 졸지에 첨예한 논쟁의 중심지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이후 82쿡닷컴 회원들은 조선일보 앞에서 기자 회견을 열고 거리 행진을 하는 등 자신들의 의견을 적극 표현했다.

장면2.

촛불 시위 중 한 여성이 전경으로부터 무차별적으로 군홧발 세례를 받고 있다. 이 장면이 고스란히 담긴 '군홧발 짓밟힌 여성, 서울대 음대생’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은 포털 사이트의 카페와 개인 블로그를 타고 순식간에 확산됐다. 이 동영상은 많은 시민들을 서울시청 앞 광장으로 불러 모으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긴 꼬리'의 힘이 유감없이 발휘된 대표적인 사례였다.


2008년 여름 대한민국을 뒤흔드는 '촛불 정국'은 미디어 지형도에도 엄청난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다. 블로그나 카페, 게시판 등이 새로운 여론의 중심으로 떠오르면서 이제 미디어 시장에서도 조직의 시대가 가고 개인의 시대가 오고 있다는 것을 실감케 하고 있다. 82쿡닷컴을 중심으로 한 조중동 광고 중단 운동이나 군홧발에 밟히는 여성을 찍은 동영상은 누군가 연출해서 만들어진 풍경이 아니다. 그냥 평범한 개인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표출한 것이 시발점이 되면서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다. 평범한 개인들이 자연스럽게 내는 목소리들이 한 데 뭉치면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런 풍경은 춧불 집회가 계속되면서 더욱 더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다음의 아고라를 비롯한 각종 인터넷 토론방과 게시판, 그리고 블로그와 카페 등은 더 이상 단순한 커뮤니티 에 머무르지 않고 있다. 이들은 사회의 여론을 주도하는 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공론장으로 떠오르고 있다. 촛불 정국의 여론을 주도하면서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주류 언론들의 기득권까지 위협하고 있다.

일찍이 하버마스는 18세기 영국과 프랑스에서 널리 유행한 카페와 살롱을 중심으로 한 토론 문화를 통해 '공론장(public sphere)'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여론의 담지자로서의 공중’들이 주축을 이룬 공론장은 사적 개인들의 단순한 친목 모임이 아니다. 공론장은 주권의지를 지닌 사적 개인들이 모여 스스로의 의지를 표현하는 공개된 장소이다. 하버마스는 공론장에 대해 '공중으로 결집한 사적 개인들의 공간'이라고 평가했다.

하버마스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의 공론장은 ‘신분에 따른 특권 의식이 작용하지 않으며, 누구나 참여하며, 토론 주제에서도 성역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었다. 즉 하버마스는 공론장에 대해 첫째, 토론을 통해 형성되며 둘째, 이전에는 배제됐던 많은 사람들이 참석할 수 있는 새로운 토론 공간이며 셋째, 발화자의 사회적 신분이 아니라 그 내용의 장점에 따라 평가되는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블로그나 카페를 중심으로 한 의제 설정 과정을 살펴보노라면 하버마스가 이야기했던 공론장을 떠올리게 하는 측면이 많다. 무엇보다 이곳에는 토론 주제의 성역이 존재하지 않는다. 또 이전까지만 해도 공적인 여론 형성 과정에서 소외됐던 일반 시민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 게다가 이 공간에서는 발화자의 신분보다는 그 내용이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보자. 한 동안 다음의 아고라를 중심으로 진행됐던 '이명박 탄핵 서명' 운동을 주도한 것은 ID ‘안단테’로 유명한 한 고등학생이었다. 그가 주도했던 탄핵 서명 운동은 순식간에 아고라 전체 공간으로 퍼지면서 서명자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중요한 것은 탄핵 서명이란 내용이었지, 그 운동을 누가 주도했느냐가 아니었던 것이다.

‘4대강 정비계획은 대운하’라고 폭로한 ‘김이태 박사를 지킵시다’ 서명운동 역시 다음 아고라를 중심으로 자연발생적으로 진행돼 불과 사흘 만에 4만5000명이 참여했다. 누군가 주도했다면 이런 식의 여론 형성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양상은 '웹 2.0'으로 대표되는 참여와 개방 시대를 맞아 더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소수의 '논객'들이 온라인 공간의 여론을 주도했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아고라에는 10대 청소년부터 30, 40대 아줌마에 이르기까지 여론의 흐름에서 소외됐던 사람들이 주도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이버 공간에서도 '논객'의 시대가 가고 '이웃'이 여론을 주도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블로그, 카페, 게시판 등은 특히 처음 이슈를 제기한 사람과 추가적으로 이슈를 확대 발전하는 사람들이 한 공간에서 활동한다는 점이 기존 언론과 다른 점이다. 말하자면 생산자와 수용자가 구분되지 않는 구조인 셈이다. 특히 생산소비자(prosumer)들로 구성된 블로그 공간에서는 이런 모습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과정에서 블로그는 링크와 트랙백 같은 대화 기제를 중심으로 여론을 확대 재생산한다. 일종의 '네트워크 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 블로그 공간의 힘은 바로 '연결성'에서 나온다. 이런 연결성을 빼놓고는 블로그 공간의 폭발적인 의제 확산 과정을 설명하기 힘들다.

통상적인 저널리즘 과정에서는 2차적 이슈 제기 과정이 1차적 제기자들과는 다른 공간에서 이루어지거나, 저널리즘 영역 바깥에서 발생하게 된다. 이를테면 전통 저널리즘의 시각으로 접근할 경우엔 뉴스를 소재로 한 토론이나, 댓글 공간에서의 공방 같은 것들은 저널리즘 활동으로 간주하기 힘들었다. 부차적으로 행해지는 활동이었을 따름이다. 하지만 블로그를 기반으로 한 뉴스 공간에서는 1차적 이슈 제기 과정과 2차적 이슈 제기 과정이 같은 공간에서 이루어질 뿐 아니라, 둘 다 같은 비중으로 간주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이슈를 확산하고, 또 재생산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블로그나 카페, 토론방 같은 곳에서의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여론에 대해 배후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구시대적인 접근법이 아닐 수 없다. 모두가 배후가 될 수도 있는 곳이 바로 블로그나 카페 공간이기 때문이다. 때론 엉뚱한 방향으로 가동되긴 하지만, 인터넷 공간에서 가동되는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이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물론 블로그나 카페, 토론방 등의 의제 설정 과정이 항상 건강한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특정한 여론이 확대 재생산되는 여론 쏠림현상의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는 곳이 바로 인터넷 공간이다. '리퍼블릭닷컴(Republic.com)'이란 저술로 유명한 썬스타인(Sunstein)은 인터넷 공간의 여론 쏠림 가능성에 대해 일찍부터 경고했다. 실제로 인터넷 공간은 경우에 따라선 노일레 노이만이 이야기했던 '침묵의 나선 이론'이 더 극단적으로 가동될 위험성도 안고 있다. 몇몇이 특정 여론을 '도배'해 버릴 경우엔 대다수의 건전한 사람들이 그 공간을 떠나버릴 수도 있다.

따라서 '사이버 공론장'으로 큰 기대를 모으고 있는 블로그나 카페, 토론방 등이 건전한 여론 형성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이런 부분에 대해 각별하게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몇 년 전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줄기세포 조작 사건 당시 여론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브릭(Bric)은 사이버 공론장의 모범으로 삼을 수 있다. 당시 브릭에서 제기된 이슈가 기존 언론 매체로 흘러들어가는 역의제설정(reverse agenda setting) 현상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공간에서 토론의 규칙을 잘 지킬 수 있었던 덕분이다.

하버마스는 공론장을 이야기하면서 부르주아들의 높은 교양 수준을 그 조건으로 제시했다. 최근 사이버 공론장으로 떠오르고 있는 블로그나 카페가 지금보다 좀 더 신뢰받는 공간으로 자리매김 하기 위해서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도 눈을 돌려야 할 것이다. 뻔한 얘기인 것 같지만, 참가자들의 '커뮤니케이션 능력(communication competence)'이 뒷받침 되지 않을 경우엔 진정한 공론장 역할을 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선 '양화가 악화를 구축'할 수 있는 토론의 규칙을 정비해 나가는 것이 꼭 필요할 것이다.

* 한국언론재단에서 발간되는 월간 <신문과방송> 8월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신문과방송>은 8월호에서 '인터넷, 공론장인가 갈등의 장인가'란 특집 기획을 마련하고 이상길 연세대 교수, 임종수 세종대 교수, 황용석 건국대 교수 등의 글을 실었습니다. 이 글도 그 기획 중 하나로 게재된 겁니다. 자세한 내용은 <신문과방송>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