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간 출간될 <Glut> 역자 후기입니다. 교정지 작업을 끝내고 오늘 역자 후기와 약력을 넘겼습니다. 아마도 8월말이나 9월초 쯤 출간될 듯 합니다. 이로써 올해 들어서만 4권째 책을 내게 되나 봅니다.


내가 대학에 입학하던 무렵엔 대학 도서관들이 폐가식으로 운영됐다. 도서 목록카드에서 도서 신청 번호를 찾은 뒤 사서에게 대출 신청을 해야만 책을 빌릴 수 있었다. 가뜩이나 억지로 책을 읽던 대학 신입생에게 그 과정은 너무나 성가셨다. 왜 이렇게 책들을 복잡하게 분류해야 하느냐며 짜증을 부렸던 기억도 있다. 모든 과정이 전산화되어 있는 요즘과는 많이 달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도서관의 기본 분류체계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멜빌 듀이란 미국 사람이 만든 듀이 십진분류법에 따라 책들을 분류해 놓은 것은 여전하다. 멜빌 듀이가 1876년에 확립한 십진분류법은 총류는 00번, 철학은 100번, 신학은 200번 등으로 분류한 뒤 세부 분류 항목들을 계속 덧붙여 놓은 방식이다. 인터넷 시대가 되면서 중요성이 크게 줄어들긴 했지만, 듀이십진분류법은 여전히 도서관을 지탱하는 중요한 지식 분류 체계로 자리 잡고 있다.


학창 시절 생물 시간에 식물과 동물들의 학명과 분류 체계를 외우느라 진땀 흘렸던 기억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인간은 포유류이기 때문에 파충류인 뱀보다는 같은 포유류인 고래와 훨씬 더 가깝다. 개구리와 두꺼비, 도룡뇽 같은 것들이 비교적 유사한 생물로 꼽히는 것도 같은 양서류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린네가 확립한 동물의 분류 체계는 단순히 그 동물이 어떤 종에 속해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다. 이 분류법을 잘 활용하면 어떤 동물들이 다른 동물들과 얼마나 가까운 지를 한 눈에 알 수 있다. 


하지만 정보 분류는 듀이나 린네 같은 한 두 명의 천재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과거 10만년 역사의 절대 다수 기간 동안 생물학적 분류작업은 인류의 가장 본질적인 문화 활동의 하나였다. 어쩌면 사물들을 분류할 수 있는 능력은 인류의 가장 위대한 진화론적 특징 중 하나인지도 모른다. 현대의 분류시스템 역시 어떤 천재적인 개인의 번뜩이는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유전적 과거로 깊숙이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 깊은 활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정보 분류법은 도서관이나 동식물 분류처럼 학문적인 영역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한 국가의 행정구역부터 시작해 모든 것들이 체계적인 분류 시스템에 따라 나눠진다. 우리들이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정보들도 모두 어떤 원칙에 따라 분류되어 있다. 하다못해 백화점에 물건을 사러 가도 분류 기준에 따라 각 층별로 배치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알렉스 라이트(Alex Wright)의 <Glut>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인류의 정보 분류 역사를 꼼꼼하게 살피고 있는 책이다. 정보 분류법은 인류의 본성에서 나온 것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최초의 민속 분류법은 문자 문화보다도 수 천 년가량 앞선다. 인류의 삶 자체가 분류법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아예 분류법에 익숙한 종족들이 훨씬 더 자손 번식에 유리했을 것이란 주장을 하고 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왜 그런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먹지 못하는 독초들과 식용 식물을 잘 분류해 놓은 종족들은 그렇지 못한 종족들보다 독초를 먹고 죽을 확률이 훨씬 적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정보 분류에 대해 다루면서 저 멀리 선사시대까지 시선을 넓혀가는 것은 바로 이런 관점에 따른 것이다. 인류가 사용해 온 모든 분류법은 고대인들이 가족들을 분류하던 방식에 그 젖줄을 대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관점에서 재봉실을 이용한 잉카의 분류법에서부터 요즘 많은 네티즌들이 사용하는 위키피디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류 방식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런 분류법들을 파고 들어가다 보면 고대의 민속 분류학과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현대 분류학의 아버지로 꼽히는 린네도 예외는 아니다. 동식물 분류법의 토대를 닦은 린네의 분류법은 민속 분류학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점이 많다. 린네 역시 분류법을 만들 때 초기의 민속 전통을 이용한 때문이다. 저자는 아예 린네 분류법이 눈에 띄는 것은 자신만의 색다른 비전을 주장하기 보다는 민속 전통을 수용하려는 의지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Glut>은 인류의 역사를 아우르는 정보 분류의 뿌리를 캐고 있는 책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꼭 도서관학이나 생물학 같은 것들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만 매력적인 것은 아니다. 저자는 정보 분류법을 매개로 인류의 지성사를 담아내고 있다. 유럽이 암흑기에 접어들었던 7세기에 아일랜드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어떻게 문명의 불씨를 이어간 이야기부터, 린네와 뷔퐁 간의 분류법 주도권 경쟁까지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이런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인간 역사 자체가 정보 분류를 둘러싼 헤게모니 다툼이란 생각까지 들 정도다. 


또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이란 논문을 통해 하이퍼텍스트의 기초를 닦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바네바 부시가 도서관을 배제한 컴퓨터 혁명에 대해 강한 불만을 제기했다는 사실 역시 흥미를 끈다. 부시는 이익이 나지 않는 곳에는 투자를 하지 않는 기업들이 주도권을 잡으면서부터 컴퓨터 혁명이 도서관을 완전히 배제했다는 것에 대해 애석해하곤 했다. 제도권 밖에서 유럽 문명을 키웠던 아일랜드 수도사들에게서 요즘 블로거들의 흔적을 발견하는 저자의 안목에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진시황을 비롯해 새로운 제국을 건설했던 많은 정복자들이 가장 먼저 이전의 도서 분류 방법을 없애고 자신만의 독특한 분류법을 만들었다는 대목 역시 흥미로웠다.


물론 <Glut>은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내용 자체는 굉장히 무거운 편이다. 게다가 동서고금의 문화사에 대한 해박한 저자의 지식을 따라가는 것이 힘겹게 여겨질 수도 있다. 몇몇 대목에선 지나치게 장황하게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때론 현란한 지적 유희를 즐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내용들을 다루는 저자의 솜씨는 예사롭지 않다. 흥미로운 사례를 통해 이론과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어 독자들이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실제로 역자도 이 책을 번역하는 내내 흥미로운 새로운 사실들을 접하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었다. 독자들 역시 비슷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번역 작업이 수월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천하의 명작도 독서 숙제가 되는 순간 악몽으로 바뀌는 것처럼, 아무리 흥미로운 책도 역자에겐 애물덩어리이기 때문이다. 번역 작업을 하는 내내, 단순히 독서의 대상으로 접근했으면 참 즐거웠을 것이란 아쉬움을 곱씹었다. 생소한 용어에 적당한 단어를 붙여주는 작업부터 영어를 좀 더 읽기 쉬운 한글 문장으로 옮기는 것까지 어느 것 하나 수월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힘겨운 작업들을 수행하면서 '집단지성'을 많이 활용했다. 서로 상이한 지적 배경을 가진 두 역자들은 번역한 부분을 크로스 체크하면서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메웠다. 또 구글이나 위키피디아도 번역작업을 하는 데 큰 힘이 됐다. 특히 생소한 용어를 적합한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구글 검색엔진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집단지성을 나눠준 이름 모를 분들께 감사드린다. 난삽한 원고를 깔끔한 책으로 탈바꿈시켜준 디지털미디어리서치 조광현 대표께도 감사의 말을 전한다.


2009년 8월 역자를 대표해서 김익현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