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첫 번역서인 <하이퍼텍스트 3.0>을 출간한 데 이어 조만간 세 번째 번역서를 내게 됩니다. (두 번째 번역서인 <분류의 역사>는 지금 출간 초읽기에 들어갔구요.) 짧은 영어실력으로 본의 아니게 번역가 노릇을 하게 됐네요.

볼터의 <Wrting Space>는 제가 하이퍼텍스트에 관심을 갖는 중요한 계기가 됐던 책입니다. 물론 란도의 <하이퍼텍스트 3.0>도 마찬가지이구요. 두 권 다 꽤 만만찮은 내용을 담고 있는 터라, 번역 작업이 무지 힘들었습니다. 독하게 마음 먹고 읽어보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아래 글은 어제 탈고한 역자 서문입니다. 번역 원고를 넘긴 지는 좀 됐는 데, 역자 서문을 미루고 미루다 이제야 탈고했습니다. 책은, 글쎄요, 내년 초쯤 나오려나?

볼터(Bolter)란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역자가 인터넷신문 기자로 변신한 지 2, 3년 쯤 지날 무렵이었다. 그 무렵 인터넷신문의 정체성을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던 역자는 우연히 다른 책을 통해 볼터의 『하이퍼텍스트와 글쓰기 공간(Writing Space)』에 대해 알게 됐다. ‘컴퓨터와 하이퍼텍스트 그리고 인쇄의 재매개’란 부제에 이끌려 서둘러 구입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종이신문과 별 다를 것 없는 인터넷신문의 제작 방식에 강한 불만을 갖고 있던 역자는 볼터의 『하이퍼텍스트와 글쓰기 공간』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특히 이 책의 핵심 주장인 ‘재매개(remediation)’에 상당히 흥분했던 기억도 있다. 그 무렵 부여잡고 있던 고민을 풀어줄 열쇠가 될 것 같은 기대감 때문이었다. 

볼터의 『하이퍼텍스트와 글쓰기 공간』은 조지 란도(G. Landow)의 『하이퍼텍스트 3.0』과 함께 뉴미디어에 대한 눈을 뜨게 해준 소중한 벗들이다. 바쁜 기자 생활 와중에 『하이퍼텍스트 3.0』과 『하이퍼텍스트와 글쓰기 공간』을 연이어 번역하게 된 것도 이런 사연 때문이다. 특히 역자는 이 두 권의 책을 번역하면서 인터넷신문 뿐 아니라 블로그, 트위터 같은 1인 미디어도 매체 발전의 연속선상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그 점 역시 두 저자들에게 감사하고 있는 부분이다.

『하이퍼텍스트와 글쓰기 공간』은 두루마리에서 필사본, 인쇄된 책을 거쳐 컴퓨터에 이르는 글쓰기 공간의 변천사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주장하는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컴퓨터는 언어적, 시각적 표현을 위한 새로운 공간을 만든다’는 것이다. 특히 이 책에서는 재매개 개념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볼터는 새로운 미디어가 이전 미디어와 갖는 경쟁적이면서도 상호협조적인 관계를 ‘재매개’라는 말로 부르고 있다.

볼터는 오늘날의 디지털 글쓰기 역시 ‘활자 매체의 재매개’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볼터는 또 현 시기를 ‘후기 인쇄 시대(the Late Age of Print)’라고 규정하고 있다. 후기 인쇄시대에 접어들면서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으로 형성된 인쇄 문명이 변형을 겪고 있다. 그는 디지털 미디어가 인쇄된 책을 개조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터의 『하이퍼텍스트와 글쓰기 공간』은 파피루스에서 필사본, 그리고 인쇄된 책을 거쳐 전자적 글쓰기로 변화하는 과정을 고찰하고 있다. 볼터는 글쓰기의 발전 과정을 뉴미디어가 올드 미디어를 대체하면서, 올드 미디어의 글쓰기 특징을 빌려온 뒤 새롭게 구성하고, 또 올드 미디어의 문화적 공간을 재형성 하는 과정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이런 과정을 바로 재매개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재매개를 통해 뉴미디어는 이전 미디어의 일부 특징을 모방하지만, 단순한 모방에 그치지 않고 그것들을 개선 발전시킨다. 따라서 재매개는 기술들 간의 문화적 완성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인터넷 공간에 새롭게 등장한 다양한 미디어들 역시 재매개란 관점에서 접근하면 한결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를테면 서사적이고 묘사적인 문구로 구성되어 있는 무(MOO)는 소설의 전자적 재매개이며, 거의 모든 텍스트가 참가자들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는 채팅 룸은 희곡의 재매개이다.

물론 저자가 이 책에서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은 바로 월드와이드 웹을 비롯한 하이퍼텍스트 공간이다. 저자는 웹이 새로운 글쓰기 공간으로 성공한 것은 인쇄물로부터 형식을 빌어오고 그것을 개혁했을 뿐 아니라, 그래픽 디자인, 사진, 영화, 텔레비전 등의 다양한 매체의 형식을 차용 발전시킨 데 힘입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볼터는 아예 한 발 더 나가 “월드와이드 웹이 성공한 것은 20세기의 다른 수많은 미디어 형식들을 재매개화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다. 

볼터는 재매개화 과정이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과정을 거친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이전 미디어의 흔적을 지워버리는 대신 자신이 그 분야의 새로운 경향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반면 이전 미디어를 받아들이고 심지어 전면에 내세우는 경우도 있다. 볼터는 전자를 ‘투명성의 비매개(transparent immediacy)’라고 부르며 후자는 ‘하이퍼매개(hypermediacy)’라고 명명했다. 

하이퍼텍스트의 재매개화 과정에서도 이 두 가지 전략이 모두 사용된다. 일반적인 산문을 사용할 때는 명백하게 전달하기 위해 전통적인 내러티브 방식을 사용했다. 반면 링크 과정을 통한 독자들의 선택을 강조할 때는 하이퍼미디어 전략을 사용한다. 바로 이런 성향 때문에 올드 미디어와 뉴미디어는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함께 변화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볼터가 주장하는 재매개는 결코 일방적인 과정이 아니다. 뉴미디어가 올드미디어를 재매개하면서 자신의 성격을 규정할 뿐 아니라, 올드 미디어 역시 뉴미디어의 영향을 받으면서 변화 발전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다양한 시각 매체의 등장 이후 구매체인 신문에 시각적 요소가 강화되는 것 등도 일종의 재매개 과정을 통해 나타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볼터의 『하이퍼텍스트와 글쓰기 공간』은 독특한 이론 전개와 하이퍼텍스트에 대한 깊이 있는 식견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특히 그가 이 책에서 제기한 ‘재매개’ 이론은 신구 미디어 간의 연속적 발전론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해주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이를 테면 볼터는 다양한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는 오늘날의 웹 페이지는 중세의 화려한 필사본과 흡사한 측면이 있다고 주장한다. 고대의 그림을 이용한 글쓰기 역시 오늘날의 디지털 글쓰기에서 새롭게 부활하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하고 있다. 그의 ‘재매개론’이 인터넷 저널리즘, 특히 포털 저널리즘의 역할을 규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이퍼텍스트 3.0』에 이어 『하이퍼텍스트와 글쓰기 공간』까지 번역하면서 본의 아니게 번역가 노릇을 하게 됐다. 하지만 연이어 두 권의 중량감 있는 학술 서적을 번역하는 기분이 썩 유쾌한 것만은 아니다. ‘번역자는 곧 반역자’라는 격언이 자꾸만 뇌리 속을 맴돌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책을 번역하면서 짧은 영어 실력과 빈곤한 배경 지식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이퍼텍스트 3.0』도 그랬지만 『글쓰기 공간』 역시 하이퍼텍스트를 논하는 단순한 기술 서적과는 거리가 멀었다. 서양의 방대한 문화적 지식을 담고 있어서 가뜩이나 짧은 영어로 힘겹게 읽어 내려가는 역자를 주눅 들게 했다. 게다가 선구적인 통찰력을 담고 있는 책답게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생소한 용어들도 역자를 힘들게 했다.

대부분의 용어들은 짧은 영어실력과 빈곤한 상상력을 결합해 우리말로 바꾸었지만 ‘transparent immediacy’와 ‘hypermediacy’에 이르러서는 상상력의 한계에 부닥치고 말았다. 이 용어들을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선 앞서 『재매개』를 번역한 이재현 교수의 것을 고스란히 빌어 왔다.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한다. 

이런 저런 부끄러운 점이 적지 않지만, 적어도 『하이퍼텍스트와 글쓰기 공간』의 학술적 가치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다. 특히 이 책은 하이퍼텍스트와 뉴미디어에 대한 깊이 있는 식견을 얻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저자의 방대한 지식을 따라가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겠지만, 그 고통을 참으면서 꼼꼼하게 읽어내려 가노라면 어느 새 뉴미디어에 대한 새로운 식견을 갖게 될 것이다. 이 책은 또 하이퍼텍스트에 대한 연구를 한 단계 진전시키는 데도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재매개를 통한 미디어 발전에 좀 더 관심이 있는 독자들은 볼터가 리처드 그루신과 공동 저술한 『재매개』를 읽어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