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상해 임시정부가 해방 후 초대 내각이 되었더라면 사태는 훨씬 좋아졌을 것이다. 그들은 선거 없이 그대로 정권을 인수한다.
(~ 중간 생략~)
이렇게 해서 한 십년 지나면 일본 아이들이 멍들여놓았던 상처도 가시고 얼이 빠졌던 해골이 제 구실을 하게 된다. 누구 말마따나 마음은 원이로되 손발이 떨려서. 그럴 즈음 외국에 유학갔던 친구들이 하나둘 돌아와서 영감들 시대는 이 정도로…  하는 의견을 슬금슬글 비치면서 근대화니, 국민경제니, 실존주의니 하며 영감들이 자신 없는 시비를 걸어온다. 지저분하게 굴지 않았을 것이다. 해방후 처음되는 보통선거를 위한 계획이 발표되고 곧 이어 제헌국회가 구성된다. ( 중간 생략) 그리고 주석 이하 요인 전원은 입후보를 사양한다. 헌법이 만들어지고 젊고 유능한 정부가 서면서 신화 시대는 끝나고 실무자들의 시대가 시작된다.   최인훈 <회색인> 289-290쪽.

최인훈의 소설 <회색인> 말미에 나오는 글이다. 대학 시절 이 부분을 읽으면서 가슴 찌릿한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신화의 시대'가 들어서야 할 시기에 (신화를 거부하는) 실무자들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민족의 비극이 시작된 것인지도 모르다.

예전에 후배들한테 이런 얘기를 한 적 있다. "지금 막 입사한 당신들이 주축이 될 때 한국의 온라인 저널리즘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것이다." 라고. 그건 내 솔직한 생각이었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온라인 저널리즘 역사에서 '신화의 시대'에 속한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영상문법보다는 텍스트 문법에 익숙한 사람. 캠코더보다는 카메라가, 카메라보다는 키보드가 익숙한 사람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세계'가 너무나 강한 세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터에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가 언론학회의 학술지인 <커뮤니케이션 이론>에 투고한 '상호작용성의 두 차원과 인터넷 저널리스트의 변신'이란 논문을 읽었다. 상당히 흥미로운 논문이었다. (개인적으론 학술논문보다는, 정교하게 잘 쓰여진 르포 기사 같은 느낌을 받긴 했지만.)

특히 저차적 상호작용성과 고차적 상호작용성이란 개념이 내 눈길을 끌었다. 온라인 저널리즘은 면대면 커뮤니케이션 시대의 고차적 커뮤니케이션을 향해 가고 있다는 그의 주장 역시 신선했다. 학술 논문이 요구하는 구체적인 수치가 뒷받침되고 있는 건 아니지만, 나름대로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부분이 있었다. 

저차적 상호작용성을 주로 구현하는 인터넷신문들의 저널리스트는 주로 기존의 전통적 매체에서 근무해온 직업기자들이다. 이들은 기존의 저널리스트 행위, 혹은 전통적 미디어 로직을 기본적으로 유지하되 인터넷의 특성을 부분적으로 활용하는 '저차적 변신'을 한다. 고차적 상호작용성을 구현하는 인터넷신문의 저널리스트들은 주로 인터넷을 통해 새롭게 저널리스트 활동을 하게 된 시민기자, 블로거 등이다. 이들은 뉴스의 소비자에서 생산자로의 '고차적 변신'을 하며, 전통적 미디어 로직으로부터도 자유롭다.
오연호 '상호작용성의 두 차원과 인터넷 저널리스트의 변신'

2000년 초 등장했던 많은 인터넷신문들, 오연호 대표의 진단대로라면 저차적 차원의 상호작용성을 주로 구현하는 인터넷신문들이 비교적 순탄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종이신문에서 나름대로 기반을 닦은 기자들이 주축을 이뤘던 영향이 크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인터넷신문'이란 신생 매체에 몸담으면서도 기자실을 비롯한 각종 헤택을 비교적 쉽게 되찾을 수 있었다.

'빛나는 훈장'과도 같았던 이런 전력은, 하지만 매체 발전이란 측면에선 스스로의 발목을 잡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전통적인 저널리즘의 문법을 쉽게 벗어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저널리즘과 상당히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많은 인터넷신문들은, 아마 이런 태생적 한계를 강하게 안고 있을 것이다. 변화된 매체 환경을 선도해 나가기 위해선 이런 출신 성분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는 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다시 오연호 대표의 논문 얘기로 돌아가보자. 그는 이 논문을 통해 '고차적 상호작용성 복원의 곡선'이란 것을 제시하고 있다. 면대면 커뮤니케이션 이후 하락 일변도였던 고차적 상호작용성이 인터넷신문의 등장과 함께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지 못한 인터넷신문도 많다.)

로저 피들러의 <미디어 모포시스>에 나오는 '공동진화' 개념과 상호작용성 개념을 혼합한 오연호의 이 곡선은, 비록 그의 말대로, 아직은 선험적인, 혹은 실험적인 차원이긴 하지만, 고객를 끄덕이게 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

이걸 좀 더 정교하게 발전시키면 꽤 의미가 있을 것 같긴 한데, '열심히 연구하시라'란 말을 하진 못하겠다. 그에겐 '학자의 길' 보단 다른 쪽이 더 의미가 있을 터이므로.
난 영화 보는 걸 썩 내켜하지 않는 반면, 영화를 소재로 울궈먹는 건 좋아한다. 그러다보니 가슴으로 영화에 몰입하는 경우는 드문 편이다. 대개는 "저거 어디에 써 먹을 수 없을까?"란 불순한 의도를 갖고 영화를 뚫어지게 '쳐다' 본다.

안성기, 박중훈 콤비가 오랜 만에 손발을 맞췄다는 '라디오 스타'도 내겐 그렇게 다가온 영화 중 하나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 난 이 영화를 한 자리에 앉아서 끝까지 본 적은 없다. 언젠가는 시간을 내어서 볼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췌해서 본' 이 영화는 UCC와 소통, 그리고 교감이란 면에서 참 많은 것을 내게 안겨줬다.

영화가 시작되고, 약 45분 쯤 흐를 때쯤 박중훈은 방송 사고를 낸다. 뭐, 원래 의욕없이 방송을 하던 그였으니, 사고랄 것도 없겠지만, 어쨌든, PD나 제작자들 입장에서 '방송 사고'였다. 역전앞 다방(?)의 김 양에게 마이크를 넘겨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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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 파악 제대로 못하는 김 양. 마이크 잡은 김에 외상 값 갚지 않은 사람들에게 독촉 멘트를 시원하게 날려준다. 그리곤 자기의 솔직한 심정을 담아, 멀리서 기다리고 있을 '엄마'에게 사랑 고백을 한다. 이 때 밖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다. (여기서 얼치기 문학도 흉내를 내자면, 영문학에서 물(비) 같은 것들은 죽음과 재생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다. 영화나 소설 같은 곳에서 결정적일 때 꼭 비가 오는 건, 분위기 탓도 있지만,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영원회귀 본능'에 호소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김 양의 이 방송은 의외로 영월(?)이란 소공동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게 된다. 이 때부터 박중훈은 'UCC의 위력'에 눈을 뜨게 된다. 브레히트가 얘기했던 라디오의 대안적 성격을 유감 없이 활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난 '라디오 스타'란, 색 바랜 책갈피 같은 영화를 UCC와 시민 저널리즘의 소중한 이상을 담고 있는 영화라고 내 마음대로 해석해버리기로 했다. (이준익 감독이 이 얘길 들으면, 펄쩍 뛸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감독의 손을 떠나는 순간,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바로 관객이다. 그게 시민 참여 미디어와 영화의 공통점이라고 생각한다.)

'라디오 스타'에서 주인공(박중훈)이 DJ로 재기할 수 있었던 건 형식 파괴 때문이 아니라, 청취자와 소통하는 방송을 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수용자의 욕구를 잘 건드려줬기 때문이란 애기와도 통한다.

UCC와 시민 참여란 기치를 내건 온라인 미디어들은 '라디오 스타'와 브레히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지난 1997년 설립된 슬래시닷은 대표적인 온라인 공론장(online public sphere)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최근 급부상했던 딕닷컴(digg.com)이 추천수 조작 시비에 휘말리면서 상대적으로 그런 시비가 적었던 슬래시닷의 평가 시스템에 관심이 쏠린다.

슬래시닷은 moderator와 metamoderator의 두 단계로 평가인력을 운영하고 있다. 물론 moderator은 슬래시닷에 매일 올라오는 글들을 평가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각 포스트들에 대해 매긴 평가점수는 그대로 사이트에 반영된다.

하지만 이런 시스템만으로는 조작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슬래시닷은 metamoderator들을 추가로 운영한다. 이들은 moderator들을 평가하는 사람들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잣대는 평가의 공정성, 정확성 같은 것들이다. (슬래시닷 회원들은 로그인하게 되면, 하루에 한번 metamoderator로 활동할 수 있다.)

슬래시닷의 온라인 공론장 메커니즘을 연구한 나다니엘 푸어(Nathaniel Poor)는 metamoderator들이 평가한 결과 moderator들의 공정성이 92-93% 수준이라고 한다.

moderator가 되려면 우선 로그인을 해야 한다.(그래야만 그들이 평가한 것들을 또 다시 평가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새롭게 가입한 사람들에겐 평가 권한을 주지 않는다. 평가시스템을 남용하다가 쫓겨난 사람들이 새롭게 아이디를 만들 가능성 때문이다. 또 평가 권한을 얻으려면 슬래시닷에 올라온 글들을 많이 읽어야 한다.

moderator로 활동하는 사람들에겐 처음에 5점을 부여한다. 그는 이 점수 내에서(한번 할 때마다 하나씩 소진된다) 평가를 해야만 한다. 따라서 자신의 포인트를 상당히 가려서 써야하는 것이다.  

슬래시닷은 또 익명으로 포스팅한 사람들은 평가 측면에선 약간의 핸디캡을 갖도록 하고 있다.

슬래시닷은 이와 함께 karma라는 제도를 적용하고 있다. 한 마디로 개인에 대한 평판 시스템이다. 이를테면 좋은 글을 올리게 되면 카르마 점수가 올라가는 반면, 관계 없는 글이나 비방, 욕설 같은 것들을 올리면 점수가 내려가게 된다.

위의 내용들은 JCMC에 게재된 'Mechanisms of an Online Public Sphere: The Website Slashdot' 을 대충 요약한 것이다.

이 논문을 쓴 푸어는 슬래시닷이 하버마스의 공론장 개념을 상당히 잘 구현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참고로 하버마스는 공론장을 구현하기 위한 조건으로 크게 네 가지를 꼽았다.

즉 공론장은 1) 담론의 공간이며, 2) 이전에는 소외되었던 새로운 사람들에게도 문호가 개방되어 있으며 3) 논의되는 이슈들이 때론 정치적이며 4) 발화자의 신분이 아니라 콘텐츠의 내용에 따라 평가받는다.

논문만 읽어서는 슬래시닷의 정확한 평가 시스템을 파악하지는 못하겠다. 잘 아시는 고수분들, 댓글 부탁.



 

In point of fact, citizen journalism reverses the sender-receiver process of traditional journalism. Whereas newspaper, television and web media use the journalist as a gatekeeper in the process of selecting and presenting news, in the citizen journalism format the journalist's role is a "shepherd" in the process. (Blogging, Citnzenship, and the Future of Media, p. 241)

시민 저널리즘에서 기자들의 역할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해 마크 글래서(Mark Glaser)란 사람은 '문지기(gatekeeper)'가 아니라 '양치기(shepherd)'라고 규정하고 있다. 즉 시민저널리즘에서 저널리스트들은 공동체의 목소리를 찾아내고, 그들이 목소리를 발하는 것을 격려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 기자들이 해야할 유일한 편집행위는 읽기 쉽게 만들어주고, 또 법적인 문제에 휘말리지 않도록 교통정리하는 역할 정도다. 이런 진단이 말 만들기 좋아하는 학자들의 현학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름대로 새겨들을 부분도 적지 않은 것 같다.

기독교에서 예수와 우리들의 관계를 흔히 양치기와 어린 양으로 비유한다.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지켜주는 분이, 바로 여호화다. 이 때 막대기와 지팡이는 '무리를 벗어나는' 양을 때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양들이 고랑에 빠졌을 때 건져내어주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 바로 막대기(혹은 지팡이?)이다. 물론 양치기가 막대기와 지팡이를 들고, 양들을 노리는 각종 맹수들과 목숨걸고 싸우는 원동력은 양들에 대한 끝없는 사랑이다.  

시민 저널리즘, 혹은 시민 참여저널리즘에서 저널리스트들은 '양치기'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글을 접하면서 난, 기독교의 '목자와 어린 양' 비유를 떠올렸다.

전문직 언론인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들은 가르치려는 욕구를 강하게 갖고 있다. 물론 언론이 무엇인지, 또 어떻게 기사를 써야 하는지에 대한 교육은 꼭 필요할 것이다. 법적인 문제도 가르쳐야 한다. 하지만 그들을 지나치게 관리하려는 욕구는 자제하는 것이 좋지 않으려나?
요즘 올블로그와 딕닷컴(digg.com)이 추천수 조작 논란에 휘말렸다. 특히 올블로그에선 하루에도 몇 건씩 추천 시스템과 관련한 글들이 올라온다. 이를 집단지성의 위기로 진단하는 글들도 수시로 눈에 띈다. 그 얘기를 하기 전에, 잠시 현학(?)을 뽐내어보도록 하자.

Johnson notes that to manage the growth of Slashdot's audience while maintaining its open and participarory structure, Sashdot relied on emergent behavior, allowing decentralized control and interactions between the audience without the interference of the sites's creator. <Blogging, Citizenship, and the Future of Media> p. 228.

스티브 존슨의 <이머전스(Emergence)>에 나오는 글을 필자가 인용한 것이다. 슬래시닷은 공개, 참여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늘어나는 독자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emergent behavior'에 의존했다는 얘기다. Emergence는 '창발' 정도로 번역되는 것 같다. 복잡계 경제학에서 주로 사용되는 용어로 '복잡계의 구성요소가 개별적으로 갖지 못한 특성이나 행동을 구성요소를 함께 모아높은 전체 구조(유기체)에서 자발적으로 돌연히 출현하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무슨 얘기인 지 알듯 모를 듯 하다.

뭐, 그 얘긴 그 정도로 넘어가고. 슬래시닷은 결국 독자들에게 분산 통제 시스템을 도입하고, 독자들간의 상호작용을 허용하는 방식을 통해 그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 스티브 존스의 진단이다. 물론 이런 시스템 도입을 통해 나름대로 성공했다는 얘기인 셈이다.  

슬래시닷을 꼼꼼하게 살펴보지 않은 입장에서, 위의 진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분명 올블로그에선 그런 노력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참여=방임이란 등식은 절대 성립하지 않는다. 최소한의 질서유지 노력(사실 말이 최소한이지, 이게 무식하게 검열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다)은 분명 뒤따라야 한다고 본다.

올브로그처럼 'winner takes all' 시스템을 유지하는 사이트에선 당연히 '추천수 조작'은 있게 마련이다. 포털에서 5분 먼저 올리면 10만 클릭(100만 클릭이었나?) 차이가 난다는 얘기가 있던데, 그 정도는 아니어도 올블로그 역시 비슷한 매커니즘으로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추천수를 조작하려는 욕구를 제어할 수 있는 시스템은 반드시 필요하다. (대중은 선하다는 것은 망상이다. 대중을 선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의 '착한 마음'이 아니다. 선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해주는 시스템이 그들을 선하게 만들어준다.)

추천수 조작=집단지성 위기?

위에 인용한 글의 필자는 커뮤니티 블로그들은 특히 다수의 폭거(tyranny of the majority)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연한 얘기이고, 별다른 토를 달 필요가 없는 주장이기도 하다.

사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따로 있다. 집단지성이란 말이 남발되고 있다는 얘기다. 추천시스템이 곧 집단지성은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추천 시스템만으로는 진정한 집단지성을 구현했다고 하기 힘들다는 게 내 생각이다. 즉 '추천수 조작=집단지성의 위기'가 아니라, 추천 시스템을 뒷받침해줄 진정한 집단지성 체제가 구축되지 않은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나는 황우석 사태가 한창일 때 브릭 사이트에서 집단지성 시스템을 제대로 구경했다. 당시 그 사이트 운영자들은 집단지성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 엄청나게 고생한 것으로 안다. 그 덕에 우리는 정말 좋은 구경할 수 있었다.)

따라서 딕닷컴이나 올블로그가 추천수 조작 시비에 휘말리게 된 것은 집단지성의 위기가 아니라는 게 내가 주장하고 싶은 요지다. 그건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집단지성 시스템을 제대로 구축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란 얘기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delight님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괜히 제목으로 낚시질 한 것 같아 좀 민망하기도 하다. 딕닷컴이야 자주 이용하지 않으니 잘 모르겠고, 올블로그는 제대로 된 집단지성 시스템을 구축했으면 좋겠다.

요즘 올드미디어들의 뉴미디어 껴안기가 상당히 활발합니다. 그저께 BBC가 유튜브와 콘텐츠를 제휴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해드린 적 있지요. 이번엔 MSNBC닷컴이 UCC 전용 섹션을 오픈했다는 소식입니다. (미국 언론들은 UCC란 말 대신 UGC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user generated contents의 약어이지요. generated와 created와 어감 차이가 조금 있지요?)

MSNBC닷컴이 독자들의 사진, 동영상, 그리고 텍스트로 된 기사들을 소화하기 위해 아예 FirstPerson이란 새로운 브랜드로 된 섹션을 하나 오픈한 겁니다. FirstPerson이란 단어가 참 의미심장한 것 같습니다.

그 얘기를 조금 해 볼까요?

요즘 제가 온라인 시민참여 저널리즘에 대해 관심을 좀 갖고 있습니다. 온라인 저널리즘에 대해서는 이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시민 참여'이란 단어를 추가한 건 최근입니다. 어렴풋이 구상하고 있는 제 학위 논문의 주제이기도 하구요.

온라인 시민 참여 저널리즘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native reporting, 혹은 original reporting입니다. 시민들이 직접 취재하거나, 아니면 자신이 직접 경험한 내용을 기사로 올리는 비중이 얼마나 되느냐는 것도 중요한 척도 중 하나인 것이지요. 외국 연구 사례들을 보면 의외로 온라인 대안 미디어들도 native reporting의 비중이 높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While the blogs studied were found to perform traditional news functions, key aspects of blogging mythology and rhetoric, such as original reporting, circumvention of mainstream media, alternative sources and- perhaps most significant in terms of political communications and democracy, suggesting action in response to news and information- were surprisingly rare. Rather than vigilante muckrakers, bloggers were activist media pundits, raising questions about their true role in political communication. (Blogging, Citizenship, and the Future of Media, p.39)


MSNBC닷컴이 UCC 섹션 이름으로 FirstPerson을 택한 것을 보면서, 바로 native reporting이란 개념을 염두에 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물론 여기서 reporting이란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보도 활동에서 조금 더 폭을 넓힌 개념이겠지요. (네이티브 리포팅은 대안 미디어 전문 이론가인 크리스 애튼(Chris Atton)의 글에서 본 겁니다. 자신이 직접 경험한 내용을 보도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네요.)

MSNBC는 최근에는 'Trading Places: Caring for Your Parents'란 시리즈물에 대한 시청자들의 의견을 한 데 모아서 사이트에 올려놓기도 했습니다. 현재까지 6000건 이상이 올라와 있다고 하네요. 이런 시도들 자체가 독자/수용자와 함께 하려는 노력에서 나온 게 아니겠습니까?

올드미디어들의 최근 움직임을 보면서 1, 2년 내에 미디어의 기본적인 미디어 패러다임이 상당히 바뀔 것이란 예상을 해봅니다. 전 이런 변화의 결과들이 두렵기도 합니다만, 한편으론 굉장한 기대감을 갖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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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탄핵방송의 공정성 문제가 화두로 떠오른 적 있다. '아무리 느슨한 잣대를 들이대더라도' 방송사의 탄핵 보도는 불공정했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결론이었다. 학회의 일부 연구자들은 획기적인 연구 업적이라는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그 문제를 놓고 작년 학회에서 논쟁을 벌인 적 있다. PD들과 학자 몇 명이 참석한 논쟁이었다. (당시 보고서를 쓴 분이 아무도 패널로 나오지 않아서 다소 의아했던 기억은 있다. 아마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 논쟁을 보면서 내가 느낀 것은 이론과 실무의 괴리였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양적 연구'의 어쩔 수 없는 한계였다. 실제로 텔레비전 화면에 나타난 기호들을 '양적'으로 비교하면 당연히 '편파적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SPSS를 돌리면, 평상시의 방송과는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편파성'만'의 문제일까? 당시 토론에 참가했던 한 PD는 이를 '선정성의 문제'로 해석했다. 신발이 날아가는 장면, 국회의원들이 울부짓는 장면 같은 것들은, 설사 탄핵이 아니더라도 '화면에 담으려고 했음직한' 그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접근하면 질적인 접근방식이 되는 것인가?

이지님이 올린 '이론과 실무'란 글을 읽으면서 난 엉뚱하게도 '이론과 실무의 괴리'를 자꾸만 떠올리게 됐다. 그건 내가 실무에 몸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끔 내가 종사하고 있는 온라인 저널리즘 관련 논문들을 읽으면서 내가 느끼는 불만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학회에서 발표되는 상당수 논문들에서 난 '왜?' 내지는 'so what?'이란 질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적어도 실무 종사자 입장에선 그랬다는 얘기다. 통계적으로 의미가 있다, 란 얘기만 지겹도록 들었지만, 그 통계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 과연 실체적 진실까지 담보할 수 있는 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통계적으로 의미가 있는' 학위 논문을 써야 한다. ^.^)

그렇다고 해서 이론의 힘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패러다임을 바꾸는 건 이론의 힘인지도 모른다. 실무에 젖어 살다보면 자신이 지금 얼마나 답답한 방식으로 일을 하고 있는 지, 관성이란 수렁 속에서 얼마나 허우적대고 있는 지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것을 지적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이론으로 무장한 학자들이다.

이지님이 실무 담당자들에게 '놀라움'을 느꼈던 만큼이나, 나도 '이론가(?)'들에게서 보편적 진리의 힘을 자주 발견하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론과 실무의 괴리를 더 강하게 느끼는 것은, '놀라움'을 주는 것은 일시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더 깊은 곳에선 여전히 강한 괴리가 자리잡고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론과 실무의 괴리를 좀 더 타파하기 위해선, 서로가 서로를 인정해야 할 듯하다. '현실을 모르는 공상가' '이론적 기반이 없는 사람들'이란 일방적 시선을 거두어들여야 할 듯 하다.

브레히트는 내게 '극작가' 이미지 보다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란 시를 남긴 시인으로 더 친숙하다. 1990년대였던가? 박일문이란 작가가 쓴 동명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 소설보다는 소설 끝부분에 붙어 있던 브레히트의 시에 더 진한 가슴떨림을 느꼈던 기억이 새롭다.

하지만 최근 나는 브레히트를 뛰어난 '시민 저널리즘 이론가'로 새롭게 만나게 됐다. 그의 '라디오 이론'은 이미 수 십 년 전에 요즘 웹 2.0을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얘기하는 '콘텐츠 생산자로서의 소비자'란 개념을 만들어내고 있다.

브레히트는 새롭게 등장한 미디어인 라디오에 주목하면서 "라디오와 같이 상호작용적이라는 기술적 잠재력을 갖고 있는 미디어는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적인 구조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브레히트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라디오는 공공 생활에 중요한 커뮤니케이션 기구로 생각될 수 있다. 그것은 대단한 통로 체계이다. 만일 라디오가 단순히 전달할 뿐만 아니라 수신도 할 경우, 다시 말해서 청취자가 듣기만 할 게 아니라 말할 수 있게 하고, 그리고 그들을 소외시키지 않고 자신들의 관계망 안에 끌어들일 경우 라디오는 대단한 커뮤니케이션 도구가 될 수 있다.
                            박춘서, <대항공론과 대안언론>. p. 38에서 재인용.
브레히트는 라디오에서 '쌍방적 미디어'의 가능성을 발견했던 것이다. 평범한 시민들이 적극 참여하는 미디어. 모두가 주인이 되는 미디어. 많은 이들은 인터넷의 등장에서, 더 '경박한' 사람들은 웹 2.0이란 말 속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하지만 시민 미디어, 양방향적 미디어에 대한 고민은 이미 그 이전부터 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독자가 기자가 될 수 있는 시민 미디어의 가능성에 대한 고민은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이다.

브레히트는 '플랫폼'만 펼쳐놓으면 '누구나 훌륭한 기자가 될 수 있는' 시민 저널리즘 세상이 펼쳐질 것이란 섣부른 기대에 대해서도 일침을 놓고 있다. 특히 요즘 '웹 2.0이 모든 걸 해결해 줄 것'이란 과감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한번쯤 들어볼만한 지적이다. 역시 그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자.


사람들은 갑자기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졌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숙고하면 그는 말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박춘서. 앞의 책.  p. 37


여기까지 쓰고 보니, 내가 <블로그 파워>에 첨가했던 구절이 떠올랐다. 그래서 서둘러 그 부분을 찾아봤다. 그 부분에서 나는 맥루한과 댄 길모어를 인용한 뒤 이런 구절을 덧붙여 놓고 있었다.


라디오는 참여라는 측면에서 볼 때 전통 매체 중 블로그와 가장 흡사한 것으로 평가된다. 하워드 쿠르츠처럼 '라디오가 블로그 현상의 전조가 됐다.'는 과감한 주장을 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는 아닐테지만, 적어도 블로그 세계의 장점 중 상당 부분은 이미 라디오가 한 차례 누렸던 것들이라는 점은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블로그는 라디오의 많은 장점들을 좀 더 발전시켰다는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김익현, <블로그 파워> p. 55.

<블로그 파워>를 쓸 때만 해도, 나는 브레히트의 '라디오 이론'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 아니 내가 꽤 좋아하는 시인이, 사실은 뛰어난 미디어 이론가였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못했다. 큰 맥락에서보면 그리 틀리지 않았던 것 같아 다행이긴 하지만, 그 책을 쓸 때 내가 브레히트의 '라디오 이론'을 알았더라면 좀 더 풍부한 서술이 가능했을 것이란 아쉬움까지 비켜갈 수는 없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