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애플다운 전략이었다.

지난 1984년 프로풋볼리그(NFL) 결승전인 슈퍼볼 중계방송 때 매킨토시 광고를 처음 선보이면서 충격을 안겨줬던 애플이 아이폰 광고 데뷔 무대로 아카데미 시상식을 택했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은 지난 25일(현지 시간) 오후 5시부터 로스엔젤레스(LA) 코닥 극장에서 코미디언 엘렌 드제네레스의 사회로 진행됐다. 이번 시상식은 미국 ABC 방송을 통해 전세계 70여개 국가에 생중계됐다.

이날 선보인 아이폰 광고에는 총 28명의 배우들이 등장해 '헬로'를 외쳤다. 물론 이들은 직접 출연한 것이 아니다. 각 영화 장면에서 '헬로'를 외치는 장면을 따온 것이다.

애플의 이번 광고에는 추억의 명배우들부터 최근 스타들까지 다양하게 배치됐다. 대표적인 것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출연했던 클라크 게이블과 '러브스토리'의 라이언 오닐.

이들 외에도 해리슨 포드를 비롯해 마이클 더글라스, 카메론 디아즈 등 인기 스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또 인기 애니메이션 '인크레더블'의 주인공도 '헬로'를 외쳤다.

"헬로. 6월에 옵니다(Coming in June)"란 마지막 카피 역시 23년 전 선보였던 매킨토시 광고를 연상케했다.

아래 동영상은 애플의 1984년 매킨토시 광고.

한 때 대표적인 P2P업체로 꼽혔던 비트토런트(BitTorrent)가 주류 사회에 발을 담그는 모양입니다. 파이낸셜타임스에 관련 기사가 떴네요.

MGM, 파라마운트, 폭스 등과 손잡고 이들의 영화와 텔레비전 쇼를 다운로드 판매한다는 게 골자입니다. 물론 무료 콘텐츠도 있구요. 가격은 2.99~3.99달러 수준입니다.

애쉬윈 내빈 비트토런트 공동 창업자 겸 사장은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2004년 설립한 뒤 벤처 캐피털(VC)들로부터 3천만 달러를 유치했다. 콘텐츠 보유자들의 권리를 보호하면서 기술적인 명성을 잘 활용하려고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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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토런트는 큰 파일을 유통시킬 때 작은 조각으로 나누는 방식을 이용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콘텐츠 조각을 서로 공유할 수 있도록 하면서 콘텐츠 제공업체의 비용 부담도 줄일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문제는 이 같은 방식이 대용량 파일을 유통시키는 데는 유용하지만 상용 서비스에 적용하는 데는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데 있습니다. 특히 인터넷으로 콘텐츠를 유통할 때도 그 콘텐츠에 대해 완벽한 통제권을 행사하길 원하는 엔터테인먼트 업체들에겐 불안한 요소가 아닐 수 없지요. 하지만 영화사들이 연이어 비트토런트와 손을 잡는 걸 보니, 이 문제에 대해서도 확신을 갖게 됐나 봅니다.

비트토런트는 이미 지난 해부터 할리우드 영화사들과의 제휴 소식을 조금씩 전해 왔던 터라, 이번 조치가 놀랄만한 일은 아닙니다. 사실 눈길을 끄는 것은 영화사들의 움직임이지요.

파이낸셜타임스와 인터뷰에 응한 애널리스트들도 이 부분을 지적하고 있네요. 음반회사들의 쓰린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얻은 것 같다구요. 공짜 서비스를 하던 P2P업체가 합법적인 유료 서비스로 전환해 성공한 사례가 드문 데, 비트토런트는 어떻게 될 지 궁금합니다.

기사원문= BitTorrent targets downloads market
  • 다큐멘터리 2007.02.26 19:21

    그렇군요. 사실 온라인상에서 그러한(영화나 등등) 컨텐츠를 소비한다는건
    호흡이나 소비방식에선 분명 변환되는 것이 마땅할텐데. 수익모델을 떠나서도 말이죠.
    이미 포탈등의 커뮤니티내에서는 저런 방식의 컨텐츠소비도 엄청 일어나고 있기도 하구요.

    비트토런트라는 업체는 이 포스트를 통해 첨 알게되었습니다 (감사)
    저도 궁금하네요 어떻게 될지.

  • GeminiLove 2007.03.02 13:53

    토런트는 그림의 떡과 같은 느낌^^. 국내에서 한시간이면 될 영화를 하루가 넘는 시간동안 다운로드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습니다.

지난 1월초 아이뉴스24에 '기자의 눈' 형식으로 썼던 글입니다. 블로그를 옮기다 보니, 철 지난 글을 포스팅 하게 됐습니다.

'삼국지'에 보면 장비가 혼자서 조조의 백만대군을 쫓아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저 유명한 장판교 사건이다.

잠시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보자. 속수무책으로 도망치던 유비를 쫓던 조조 군대는 장판교에 다다른다. 당시 장비의 수하에 있던 병사는 겨우 20명 남짓. 하지만 장판교에 버티고 있는 장비를 본 조조는 선뜻 진격 명령을 내리지 못한다.

물론 근처에 유비의 군대가 매복해 있을 것이라는 '특유의' 의심이 발동한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뇌리에는 이전에 자신에게 의탁하고 있던 천하의 맹장 관우가 한 말이 자리잡고 있었다. "내 아우 장비의 용맹에 비하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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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락부락한 장비와 대치하고 있던 조조 군대는 "한판 붙자"는 장비의 호령에 놀라 줄행랑을 친다. 나관중의 '삼국지'에 담긴 얘기다.

요즘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수 천 년 전을 무대로 하는 삼국지와 비슷하다. 장판교에 선 장비 같은 장수는 실리콘밸리 최고의 아이디어 맨인 스티브 잡스. 조조의 백만대군은 세계 최대 전자쇼인 CES에 참가한 업체들이다.

AP통신에 따르면 스티브 잡스가 맥월드 기조 연설을 통해 아이폰과 애플TV를 선보인 이후 CES 전시회 참가자들의 관심이 600마일 떨어진 샌프란시스코로 향하고 있다.

게다가 파나소닉의 야먀다 요시 최고경영자(CEO) 얘기는 더 놀랍다. CES에 참가했던 야마다 CEO는 곧바로 샌프란시스코로 날아가 스티브 잡스의 맥월드 기조연설을 들었다. 물론 스티브 잡스가 새롭게 내놓은 아이폰과 애플TV 셋톱 박스를 직접 눈으로 보기 위해서였다.

야마다 CEO는 다시 CES 행사장으로 돌아온 뒤 AP와 인터뷰를 통해 "정말로 맥월드 전시장에 가보고 싶었다. 아이폰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CES에서는 해마다 2천700여 이상 업체들이 신제품을 내놓으면서 관람객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열띤 경쟁을 벌이고 있다. 물론 여기서 수 많은 관람객의 시선을 끌어모으는 것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하지만 올해는 라스베이거스에는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은 애플이란 괴물까지 CES 참가업체들을 괴롭히고 있는 형국이다. 아이폰과 애플TV가 발표된 이후에는 온통 관심이 그쪽으로 쏠리고 있기 때문이다.

야후의 테크놀로지 웹 사이트 칼럼니스트인 크리스토퍼 널은 "애플도 일개 회사에 불과하다. 따라서 CES가 그들을 필요로 하는 만큼이나 그들 역시 CES를 필요로 한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애플 제품들에 관한 얘기를 듣길 원한다. 스티브 잡스 한 사람에게 휘둘리고 있는 것이다"라고 꼬집었다.

겁도 없이 세계 최대 전시회인 CES와 같은 기간에 맥월드를 개최하는 애플의 오만함이 통하고 있다는 얘기다.

외신들을 꼼꼼히 살펴보면 이 같은 상황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맥월드가 개막되기 전까지만 해도 CES 소식을 전하기에 바빴던 외신들이 아이폰 발표 이후에는 맥월드 쪽으로 관심을 돌려 버린 양상이다.

물론 대형 전시회는 개막 이틀째를 지나고 나면 큰 이슈가 없는 게 보통이다. 따라서 CES가 맥월드와 스티브 잡스의 후광에 완전히 가려져 버렸다는 것은 다소 과한 진단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스티브 잡스가 보여준 개인기는 장판교에 우뚝 서 있던 장비를 연상케 할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AP통신이 전하는 것처럼 "CES 참가자들도 온통 그 쪽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정도"다.

여기서 다시 '삼국지' 얘기로 돌아가보자. 혼비백산해서 도망가던 조조는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장판교로 돌아간다. 그 때는 장비 역시 유유히 도망을 간 뒤였다.

이 때 장비는 '장판교를 잘라 버리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한다. 그 모습을 통해 장비를 따르고 있던 것이 겨우 20여 명의 군사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아챈 조조는 다시 추격전을 시작한다.

지금 아이폰이라는 신제품을 공개한 스티브 잡스의 다음 행보가 기다려지는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 과연 겉만 번드르르한 깜짝 상품에 불과할까? 아니면 겉모양 못지 않게 막강한 내공을 보유하고 있을까?

전 세계에 강한 충격파를 안겨준 스티브 잡스의 멋진 쇼를 보면서 기자는 자꾸만 장판교에 우뚝 선 장비를 떠올리게 됐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던져 봤다. "그의 뛰어난 상상력과 놀라운 연출력의 위력이 어디까지 갈까?"

개인적으로 스티브 잡스를 무척 좋아하는 기자는, 앞으로 그가 보여줄 행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할 것 같다.

한 때 탄핵방송의 공정성 문제가 화두로 떠오른 적 있다. '아무리 느슨한 잣대를 들이대더라도' 방송사의 탄핵 보도는 불공정했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결론이었다. 학회의 일부 연구자들은 획기적인 연구 업적이라는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그 문제를 놓고 작년 학회에서 논쟁을 벌인 적 있다. PD들과 학자 몇 명이 참석한 논쟁이었다. (당시 보고서를 쓴 분이 아무도 패널로 나오지 않아서 다소 의아했던 기억은 있다. 아마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 논쟁을 보면서 내가 느낀 것은 이론과 실무의 괴리였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양적 연구'의 어쩔 수 없는 한계였다. 실제로 텔레비전 화면에 나타난 기호들을 '양적'으로 비교하면 당연히 '편파적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SPSS를 돌리면, 평상시의 방송과는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편파성'만'의 문제일까? 당시 토론에 참가했던 한 PD는 이를 '선정성의 문제'로 해석했다. 신발이 날아가는 장면, 국회의원들이 울부짓는 장면 같은 것들은, 설사 탄핵이 아니더라도 '화면에 담으려고 했음직한' 그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접근하면 질적인 접근방식이 되는 것인가?

이지님이 올린 '이론과 실무'란 글을 읽으면서 난 엉뚱하게도 '이론과 실무의 괴리'를 자꾸만 떠올리게 됐다. 그건 내가 실무에 몸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끔 내가 종사하고 있는 온라인 저널리즘 관련 논문들을 읽으면서 내가 느끼는 불만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학회에서 발표되는 상당수 논문들에서 난 '왜?' 내지는 'so what?'이란 질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적어도 실무 종사자 입장에선 그랬다는 얘기다. 통계적으로 의미가 있다, 란 얘기만 지겹도록 들었지만, 그 통계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 과연 실체적 진실까지 담보할 수 있는 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통계적으로 의미가 있는' 학위 논문을 써야 한다. ^.^)

그렇다고 해서 이론의 힘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패러다임을 바꾸는 건 이론의 힘인지도 모른다. 실무에 젖어 살다보면 자신이 지금 얼마나 답답한 방식으로 일을 하고 있는 지, 관성이란 수렁 속에서 얼마나 허우적대고 있는 지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것을 지적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이론으로 무장한 학자들이다.

이지님이 실무 담당자들에게 '놀라움'을 느꼈던 만큼이나, 나도 '이론가(?)'들에게서 보편적 진리의 힘을 자주 발견하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론과 실무의 괴리를 더 강하게 느끼는 것은, '놀라움'을 주는 것은 일시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더 깊은 곳에선 여전히 강한 괴리가 자리잡고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론과 실무의 괴리를 좀 더 타파하기 위해선, 서로가 서로를 인정해야 할 듯하다. '현실을 모르는 공상가' '이론적 기반이 없는 사람들'이란 일방적 시선을 거두어들여야 할 듯 하다.

  • 다큐멘터리 2007.02.25 17:25

    "서로가 서로를 인정해야한다"라는 마지막 말씀. 그보다 더 원초적으로 서로를 인식.이라도 했으면 합니다. 어줍잖게나마 이론의 세계에서 발끝을 살짝 담궈보다가 실무의 세계로 넘어온지 얼마되지않았습니다만, 저 역시 '놀라움'을 주는건 일시적이거나, 혹은 그 개인에 한정된 케이스로 치부해버렸던것 같아요.
    매우 공감가는 글 잘 읽고 갑니다

  • 다큐멘터리 2007.02.26 19:41

    이지님 블로그에 남겨두신 이람님 코멘트처럼, 어쩌면 일을 잘하기 위해, 혹은 연구를 잘하기 위해 서로는 절대 필요한 요소인거겠죠.
    또. 문득, 저렇게 양분화해서 인식하는것부터가 벽을 만들게되는것도 같구요.
    네..어려워요.

브레히트는 내게 '극작가' 이미지 보다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란 시를 남긴 시인으로 더 친숙하다. 1990년대였던가? 박일문이란 작가가 쓴 동명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 소설보다는 소설 끝부분에 붙어 있던 브레히트의 시에 더 진한 가슴떨림을 느꼈던 기억이 새롭다.

하지만 최근 나는 브레히트를 뛰어난 '시민 저널리즘 이론가'로 새롭게 만나게 됐다. 그의 '라디오 이론'은 이미 수 십 년 전에 요즘 웹 2.0을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얘기하는 '콘텐츠 생산자로서의 소비자'란 개념을 만들어내고 있다.

브레히트는 새롭게 등장한 미디어인 라디오에 주목하면서 "라디오와 같이 상호작용적이라는 기술적 잠재력을 갖고 있는 미디어는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적인 구조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브레히트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라디오는 공공 생활에 중요한 커뮤니케이션 기구로 생각될 수 있다. 그것은 대단한 통로 체계이다. 만일 라디오가 단순히 전달할 뿐만 아니라 수신도 할 경우, 다시 말해서 청취자가 듣기만 할 게 아니라 말할 수 있게 하고, 그리고 그들을 소외시키지 않고 자신들의 관계망 안에 끌어들일 경우 라디오는 대단한 커뮤니케이션 도구가 될 수 있다.
                            박춘서, <대항공론과 대안언론>. p. 38에서 재인용.
브레히트는 라디오에서 '쌍방적 미디어'의 가능성을 발견했던 것이다. 평범한 시민들이 적극 참여하는 미디어. 모두가 주인이 되는 미디어. 많은 이들은 인터넷의 등장에서, 더 '경박한' 사람들은 웹 2.0이란 말 속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하지만 시민 미디어, 양방향적 미디어에 대한 고민은 이미 그 이전부터 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독자가 기자가 될 수 있는 시민 미디어의 가능성에 대한 고민은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이다.

브레히트는 '플랫폼'만 펼쳐놓으면 '누구나 훌륭한 기자가 될 수 있는' 시민 저널리즘 세상이 펼쳐질 것이란 섣부른 기대에 대해서도 일침을 놓고 있다. 특히 요즘 '웹 2.0이 모든 걸 해결해 줄 것'이란 과감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한번쯤 들어볼만한 지적이다. 역시 그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자.


사람들은 갑자기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졌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숙고하면 그는 말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박춘서. 앞의 책.  p. 37


여기까지 쓰고 보니, 내가 <블로그 파워>에 첨가했던 구절이 떠올랐다. 그래서 서둘러 그 부분을 찾아봤다. 그 부분에서 나는 맥루한과 댄 길모어를 인용한 뒤 이런 구절을 덧붙여 놓고 있었다.


라디오는 참여라는 측면에서 볼 때 전통 매체 중 블로그와 가장 흡사한 것으로 평가된다. 하워드 쿠르츠처럼 '라디오가 블로그 현상의 전조가 됐다.'는 과감한 주장을 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는 아닐테지만, 적어도 블로그 세계의 장점 중 상당 부분은 이미 라디오가 한 차례 누렸던 것들이라는 점은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블로그는 라디오의 많은 장점들을 좀 더 발전시켰다는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김익현, <블로그 파워> p. 55.

<블로그 파워>를 쓸 때만 해도, 나는 브레히트의 '라디오 이론'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 아니 내가 꽤 좋아하는 시인이, 사실은 뛰어난 미디어 이론가였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못했다. 큰 맥락에서보면 그리 틀리지 않았던 것 같아 다행이긴 하지만, 그 책을 쓸 때 내가 브레히트의 '라디오 이론'을 알았더라면 좀 더 풍부한 서술이 가능했을 것이란 아쉬움까지 비켜갈 수는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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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에 나온 따끈따끈한 책이다. 박사 논문 준비 운동도 할 겸해서 주문한 책. 이 책은 블로그, 시민 저널리즘, 그리고 미디어의 미래라는 세 가지 층위로 구성돼 있다.

저자가 서문에 밝힌 대로 하버마스의 이상이 블로고스피어에서 제대로 실현될 것인가란 것을 알아보는 것이 이 책의 주요한 주제 중 하나다.

Whether the activity that occurs within the blogosphere fits the Habermasian ideal is one topic of this book. (vii)
블로거가 갖는 힘에 대해 저자는 크게 세 가지 진단을 내놓고 있다. 뭐, 특별한 것은 없는 진단이고, 또 이젠 상식으로 통하지만, 그래도 한번쯤은 되뇌어볼만하다.

Their influence stems from several factors. First, they haver outsider status. Like television news in the 1950s, they are seen by users as conduits to raw information, somehow less corrupted by power than their predecessors. Second, some have attained a large audience. Regardless of whether they "should" have an audience, they do, and with it comes power. Third, they have the "power of the collective."


여자는 '희귀 고서적에 취미가 있는' 가난한 작가이고, 남자는 다소 고지식하면서도 친절한 서점 점원이다. 여자의 거주지는 미국 뉴욕이며, 남자는 영국 런던에 살고 있다. 여자는 미혼이고, 남자는 기혼이다.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 하지만 둘은 20년간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편지를 주고 받는다. 때론 고마운 심정을 담아 전하기도 하고, 또 때론 재바르게 움직여주지 않는 상대에게 불평불만을 마구 털어놓는다.  


헬렌 한프의 [채링크로스 84번지]는 이처럼 상큼한 이야기들을 빼곡하게 담고 있는 알찬 책이다. 까탈스러우면서도 정이 많은 가난한 여작가 헬렌 한프. 때론 까탈스럽게 또 때론 풋풋하게 사연을 보내오는 헬렌의 변덕스러운 편지에 항상 여유있게 대처하는 서점 직원 프랭크 도엘. 이 두 사람의 편지는 1949년부터 1969년까지 꼬박 20년간 계속 이어진다. 물론 그 둘을 이어주는 끈은 책이다.

하지만 [채링크로스 84번지]가 전하는 것이 책 얘기 뿐이라면, 흔하디흔한 독서 평론같은 책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책에는 그 이상의 것이 담겨 있다. 한 권의 책을 얻기 위해 온 정성을 다하는 작가와, 그 작가의 '책을 향한 욕망'을 채워주려는 서점 점원의 사랑이 가득 들어차있다. (사실 이 책은 영화로 먼저 만났다.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84번가의 연인'이란 영화에는 앤서니 홉킨스가 출연해 멋진 연기를 선사해줬다.)

헬렌 한프는 좋은 책을 만났을 때는 "책이 너무 훌륭하여 제 누런 골동품 책장이 부끄러울 정도랍니다"(12쪽)며 맘껏 찬사를 보낸다. 뉴먼의 [대학의 이상]이란 책의 초판을 구했을 땐 "이 책을 하루 종일 탁자 위에 두고 타자를 치다가 한번씩 만져보곤 해요. 이게 초판이라서가 아니라 이렇게 아름다운 책은 난생 처음보기 때문이에요. 이걸 제가 소유한다는 사실에 살짝 죄책감마저 들어요."(34쪽)라는 말을 전한다.

자신이 주문한 책이 제 때 오지않으면 "프랭크 도엘씨, 거기서 뭐하고 있는 거에요? 우두커니 앉아 빈둥거리고 있나요? ~ 제가 부활절 토끼에게 당신한테 달걀을 갖다주라고 명령을 내렸어요. 토끼 군이 거기 도착하면 무기력증으로 죽어있는 당신을 발견하게 되는건가요?"(22쪽)라며 불평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그 불평 뒤켠엔 친절하고 믿음직스럽게 자신의 주문을 처리해주는 상대에 대한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 그 믿음이 이들의 우정을 20년간이나 이어준 원천이다.  


이처럼 프랭크와 헬렌이 나누는 우정은 수채화처럼 상큼하다. 그 속엔 문화와 인생, 그리고 예술에 대한 사랑이 절절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사소한 일상의 기쁨마저 서로 나누는 모습에선, 여느 연인들 못지 않은 따사로운 정마저 느껴질 정도다.

결코 입 밖에 내지 않은 둘의 애정은 친애하는 부인으로 시작해, 친애하는 한프양을 거쳐 헬렌으로 바뀌면서 조금씩 암시될 뿐이다. 또 여자가 부르는 호칭 역시 선생님에서 친애하는 프랭크, 프랭키로 발전해나간다.

유별나지 않으면서도 유별난 두 사람의 사랑. 늘 서로를 아껴주고 위해주면서도 끝내 만나지 않는 두 사람. 프랭크와 헬렌이 나누는 '책을 매개로 한 사랑'이 여타의 사랑과 다른 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처럼 아름다운 교제는, 주변의 사람들까지 자연스럽게 '공동체'로 이끌어주게 된다.

프랭크가 죽은 뒤 그의 부인 노라는 헬렌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때때로 제가 당신을 아주 질투했다는 얘기도 이젠 할 수 있겠네요. 프랭크는 당신 편지를 정말 좋아했고 당신 편지들은 어딘가 그이의 유머 감각과 아주 닮았거든요. 또 당신의 글솜씨도 부러웠답니다.”(144쪽)

이 책에서 눈에 띈 구절 몇 가지.

"저는 속표지에 남긴 글이나 책장 귀퉁이에 적은 글을 참 좋아해요. 누군가 넘겼던 책장을 넘길 때의 그 동지애가 좋고,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누군가의 글은 언제나 제 마음을 사로잡는답니다."(50쪽)
"읽어보지 않은 책을 사는 것은 제 원칙에 위배되는 일이에요. 입어보지 않고 옷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죠."(73쪽)
"그렇게 아름다운 것을 브로드웨어 영화표 한 장 값에, 또는 충치 하나 뗌질하는 비용의 50분의 1 값에 평생 소유할 수 있다니, 세상 참 이상하지요?"(83쪽)

이 책을 읽으면서 인터넷서점을 통해 간편하게 책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행복한 것만은 아니란 생각을 해 봤다. 혹시 그 속엔 '정'이 빠진 것 아니냐는, 괜한 투정도 한번 부려봤다. '영혼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책'을 읽은 부작용이다.

책을 덮으면서, 프랭크가 세상을 떠난 뒤 헬렌이 남긴 편지를 새롭게 되새김질 해 봤다. 나 역시 비슷한 감정을 느끼면서.

"이 모든 책을 내게 팔았던 그 축복 받은 사람은 몇 달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리고 서점주인 마크스 씨도요. 하지만 마크스 서점은 아직 거기 있답니다. 혹 채링크로스 가 84번지를 지나가게 되거든, 내 대신 입맞춤을 보내주시겠어요? 제가 정말 큰 신세를 졌답니다."(145쪽)

 

  • SEO 2013.02.05 16:24

    Very interesting post….really informative…..of all the blogs I have read on the same topic, this one is actually enlightening….

Blogging helps you better understand your audience. The hallmark of any blog is the ability for readers to post comments to what you write. By having this regular conversation with readers, you learn what hits and what misses.

For newspapers that are rapidly becoming irrelevant to a growing number of people, this is a huge issue. If you write post after post that garners no response, then it ought to be telling you something. In print, we’ve been able to kid ourselves for decades that every reader is savoring every word of our prose. Online, it’s painfully clear what readers do and don’t care about.



요즘 블로그와 저널리즘의 결합 문제가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위의 글은 Chris Cobbler 란 사람이 쓴 'Why journalists should blog' 중 일부다. (원문은 www.greeleytrib.com/article/20070220/BLOG001/70220004로 가면 된다.)

독자들을 알고, 그들과 대화를 한다는 것. 이것이 정말로 중요한 것 같다. 이를 위해선 독자들과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커튼을 걷어내야만 한다. 그러다 보면 때론 '알몸'을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걸 두려워해선 안된다. 중요한 것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는 것'이다.

지난 1월 23일 아이뉴스24에 쓴 기사입니다. 충격적인 매킨토시 광고를 떠올리면서 약간 오버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23년 전인 1984년 1월 22일(미국 현지 시간). 미국 텔레비전 시청자들의 관심은 온통 이날 벌어질 프로풋볼리그(NFL) 결승전인 슈퍼볼 중계방송에 쏠려 있었다.

플로리다 주 탬파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제18회 슈퍼볼에 초대된 팀은 LA 레이더스와 워싱턴 레드스킨스. 하지만 이날의 주인공은 사상 처음으로 슈퍼볼에 입맞춤을 한 LA 레이더스가 아니었다.

이날의 진정한 주인공은 바로 애플컴퓨터와 스티브 잡스였다. 당시 애플은 슈퍼볼 중계방송 시간에 매킨토시의 탄생을 알리는 60초 짜리 광고를 선보이면서 전 세계 텔레비전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오웰의 '1984'와 IBM PC 맘껏 조롱

미래 사회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담은 영화 '블레이드 러너'로 유명한 리들리 스콧 감독이 제작한 매킨토시 광고는 충격적인 메시지와 영상으로 광고사에 길이 남을 명품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성공했다.  

애플의 광고는 굳은 표정의 시민들이 극장에 앉아 대형 스크린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는 장면으로 시작했다. 극장 내부엔 숨막힐듯한 분위기마저 연출되고 있었다. 대형 스크린에선 '빅 브러더(Big Brother)'가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이 때 갑작스럽게 금발의 여성이 뛰어들어온다. 그는 경찰의 제지를 뚫고 강당으로 뛰어 들어와 스크린을 향해 해머를 던졌다. 스크린이 산산조각나는 순간, 뜻 밖의 메시지가 흘러나온다.

"1월 24일 애플 컴퓨터가 매킨토시를 소개합니다. 여러분들은 현실의 1984년이 어떻게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처럼 되지 않을 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매킨토시의 등장을 알리기 위해 조지 오웰의 '1984'를 비틀었다. 물론 '빅브라더'로 묘사된 것은 당시 세계 시장을 지배하고 있던 '빅블루' IBM의 PC였다.

애플은 당돌하게도 매킨토시를 앞세워 IBM PC 시대를 끝장내겠다고 선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 방송된 뒤 엄청난 성공

애플이란 회사를 전 세계에 알린 매킨토시 광고가 슈퍼볼 중계방송 전파를 타기까지의 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치아트 데이(Chiat/Day)가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란 슬로건과 함께 기본 컨셉트를 잡은 이 광고는 애플 컨퍼런스에서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애플 이사진들은 슈퍼볼 광고 금지령을 내려버렸다. 자칫하면 1980년대 최고 명작 광고로 꼽히는 매킨토시 광고가 그냥 조용히 사라져버릴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이 때 스티브 잡스와 함께 애플을 창업했던 스티브 워즈니악이 분연히 일어섰다. 그는 이사회가 금지하면 자비로라도 슈퍼볼 중계방송 때 매킨토시 광고를 하겠다고 맞섰다.

이런 과정을 거쳐 방송된 이 광고는 당시 46.4%란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매킨토시란 새로운 제품을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23년이 지난 지금 애플은 회사명에서 컴퓨터란 단어를 떼어내 버리면서 "더 이상 컴퓨터 업체로 보지 말아달라"고 선언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애플이 던진 메시지는 강한 울림을 남기면서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있다.

한국언론재단에서 발간되는 <신문과방송> 2월호에 기고한 원고입니다. 해외 언론명저 다이제스트 코너이지요. 웹과 하이퍼텍스트에 관심있는 분들께는 <하이퍼텍스트 3.0>은 정말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조지 랜도우는 미국의 대표적인 ‘하이퍼텍스트 이론가’로 꼽히는 학자다. 브라운대학 영문학 교수인 그는 지금으로부터 17년 전인 1990년에 ‘하이퍼미디어와 문학연구(Hypermedia and Literary Studies)’란 책을 엮어낸 것을 신호탄으로 ‘하이퍼텍스트(Hypertext)’ ‘하이퍼/텍스트/이론(Hyper/Text/Theory)’을 잇달아 엮어내면서 하이퍼텍스트 이론화 작업에 한 발 앞서갔다.

지난 2006년 출간된 ‘하이퍼텍스트 3.0’은 ‘지구화 시대의 비평이론과 뉴 미디어’란 부제를 달고 있다. 10년 전인 1997년 ‘하이퍼텍스트 2.0’의 부제로 ‘현대 비평이론과 테크놀로지의 수렴(The convergence of contemporary critical theory and technology)를 선택했던 그는 이번에 출간한 3판에 ‘지구화’라는 단어를 덧붙이면서 10년 세월 동안 변화된 인터넷 환경을 묘사하고 있다.

링크로 경계를 넘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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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도우는 이 책 서문을 통해 ‘하이퍼텍스트 3.0’을 내놓게 된 것은 웹의 엄청난 성장세와 ‘읽고 쓰기(read-write) 하이퍼텍스트인 블로그의 발전, 그리고 플래시 등을 활용한 애니메이션 텍스트에 대한 관심 증가 등을 담아내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런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하이퍼텍스트 3.0’를 통해 저자는 읽기, 쓰기와 함께 링크(link)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는 아예 “웹이 발전하면서 적극적인 읽기가 한층 활기를 띠게 됐다. 이에 따라 우리는 직접 쓰기를 원하는 독자들의 모든 작품들이 출판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6쪽)”고 주장하고 있다. 이 같은 적극적인 읽기의 밑바탕에는 하이퍼텍스트의 최대 강점인 링크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저자인 랜도우의 생각이다.

링크는 작가와 독자, 선생과 학생 간의 경계뿐 아니라 한 텍스트와 다른 텍스트 사이의 경계를 이동시키고 있다. 특히 링크는 작가, 텍스트, 작품, 읽기에 대한 우리들의 경험에 혁명적인 효과를 부여한다. 하이퍼텍스트가 궁극적으로 독자와 저자 간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들어준다면,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링크라는 것이다.

링크를 기반으로 한 ‘적극적인 읽기’라는 관점에서 랜도우가 관심을 갖는 것은 바로 블로그다. 블로그 독자들은 네트워크로 연결된 컴퓨터 환경에서 글을 쓰기 때문에 의견이 덧붙여진 블로그(commented-on blog)는 트랙백을 통해 적극적인 독자의 텍스트에 연결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토론을 계속할 수 있게 된다(7쪽).

블로그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읽고 쓰기’ 텍스트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랜도우는 이 같은 질문에 대해 “다른 형태의 글쓰기나 인쇄물에 비해 독자들에게 더 많은 힘을 부여해 주는 것”이라는 대답을 내놓는다.

블로그는 두 가지 형태의 하이퍼텍스트 성을 채용한다. 첫째, 토론방 리스트와 달리 모든 블로거들은 연대기적으로 먼 개별 글들을 서로 링크할 수 있다. 따라서 독자들이 사건들에 맥락을 부여할 수 있으며, 글쓴이들이 또 다시 설명을 해주지 않아도 모든 이야기를 접할 수 있게 된다.

하이퍼텍스트의 적극적 독자 만들기

두 번째 특징은 독자들이 블로그의 글들에 논평을 달 수 있는 블로그 시스템으로 인한 것이다(77-78쪽). 블로그는 특히 하이퍼텍스트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블로그 형식은 넬슨, 반 담 등 많은 하이퍼텍스트 선구자들이 형상화한 적극적인 작가-독자라는 관념을 웹 상에서 처음으로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조지 랜도우는 이처럼 블로그에서 볼 수 있는 완벽한 읽기-쓰기 텍스트(read-write text)는 탄압적이고 획일적인 목소리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56쪽). 일부 블로거들이 외부의 논평을 차단하거나 제한하려고 해도 결국 구글을 비롯한 검색 엔진을 통해 만 천하에 드러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저자의 힘을 제한하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랜도우는 ‘읽기 쓰기 텍스트’인 하이퍼텍스트가 소극적인 독자들을 적극적인 독자로 바꾸어 놓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이퍼텍스트는 페이지 형식으로 묶여진 책에서는 불가능한 상호텍스트성을 구현할 수 있다. 이 같은 상호텍스트성은 다양한 목소리를 한 자리에 모을 수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조지 랜도우가 주장하는 읽기-쓰기 텍스트라는 개념은 요즘 포털들과 각종 온라인 매체들이 금과옥조처럼 받들고 있는 UCC(이용자 제작 콘텐츠)의 이론적 바탕이라고 해도 크게 그르지 않을 것 같다. UCC를 통해 자기 의견을 개진하는 사람들이 랜도우의 ‘적극적인 독자’이며, 이들이 쓰는 글들을 ‘읽기-쓰기 텍스트’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저자와 독자간 권력이동 현상

조지 랜도우는 이 책을 통해 “모든 형태의 하이퍼텍스트는 텍스트와 텍스트성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바꾸어 놓는다(102쪽)”라고 주장한다. 즉 하이퍼텍스트라는 새로운 정보기술은 텍스트성에 대한 우리들의 경험을 재설정할 뿐 아니라 저자와 텍스트의 관계에 대한 우리들의 개념까지 바꿔 놓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필연적으로 여러 가지 비동시적 협업 형태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특히 독자들이 텍스트에 직접 링크를 추가할 수 있도록 완벽하게 네트워크화된 하이퍼텍스트 환경에서는 저자뿐 아니라 편집자도 상당한 힘과 통제력을 잃게 된다(103쪽).

검색을 통해 정보를 찾을 경우에는 적극적인 독자들이 중요하지 않은 정보를 갖게 되거나, 혹은 그 가치를 제대로 결정할 수 없는 정보들을 갖게 되는 경향이 많다. 반면 하이퍼텍스트는 링크 형태로 편집자들이 승인한 연결을 제공하기 때문에 소위 ‘주 텍스트’로부터 같은 텍스트의 다른 경로로 갈 수 있으며, 이와 관련된 설명을 제공해주는 텍스트로도 이동해 갈 수 있도록 해 준다.

조지 랜도우는 하이퍼텍스트 글쓰기가 피카소, 브라크 등과 입체파 화가들의 작품들과 많은 핵심적 특징들을 공유한다고 주장한다. 즉 일종의 콜라주 적인 글쓰기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콜라주 글쓰기에서는 주 텍스트뿐 아니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에까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따라서 새로운 읽기 종류를 만들어내게 되는 것이다. 특히 개별 렉시아(lexia, 개벌 문서 덩어리)의 공간적 배치가 중요해짐에 따라 인쇄 텍스트를 읽는 방식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는다. 그렇기 때문에 하이퍼텍스트 글쓰기를 할 때는 시각적 쓰기까지 감안해야만 한다(195쪽).

적극적인 독자, 심지어는 끼어드는 독자를 만들어내는 하이퍼텍스트는 이런 융합 활동의 완성을 향해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간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데 있어 하이퍼텍스트는 저자의 권한 중 일부를 빼앗아 독자에게 이전해 준다. 저자의 힘을 침범하는 것이다. 저자와 독자 사이의 이런 권력 이동 현상을 통해 하이퍼텍스트가 자동적으로 독자들을 저자와 공동 저자로 만들어준다는 것은 아니다. 하이퍼텍스트 환경에서는 독자들에게 자신들이 읽은 텍스트에 링크나 다른 텍스트를 추가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해주는 것이다.

물론 블로그 같은 읽고-쓰기 하이퍼텍스트라 할 지라도 독자들에게 다른 사람들이 작성한 텍스트를 수정할 권리를 허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이퍼텍스트는 인쇄와 필사본 시대에는 분리돼 있던 개별 문서의 현상학적 거리를 좁혀 주는 역할을 한다. 텍스트의 자치를 줄이는 방식을 통해 하이퍼텍스트는 저자들의 자치권을 줄여 준다(126쪽).

이 같은 관점에서 조지 랜도우는 작가와 독자 사이의 경계는 대부분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때 작가와 독자 사이의 경계 소멸은 작가가 아니라 독자에게 달려 있다. 독자들이 자신들의 논평이나 개인 문서를 만든 뒤 이를 링크하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작가와 독자 간의 분명한 구분이 흐려지기 시작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사라질 위험에 처해 있다(344쪽).

요즘 웹 2.0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면서 ‘개방과 공유’라는 표현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또 네티즌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가 큰 성공을 거두면서 ‘공동작업(collaboration)’이란 말도 힘을 얻고 있다. 집단 지성(collective intelligence) 역시 웹 2.0 담론에서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개념들을 접하면서 그 신선함에 감탄을 한다. 하지만 이 같은 개념들 역시 ‘웹 2.0’이란 깃발을 들고 나온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개방과 공유, 그리고 집단 지성은 인터넷의 모태나 다름 없는 하이퍼텍스트에서 가장 중요한 사상이다.  하이퍼텍스트 이론을 처음 이끌어냈던 바네바 부시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은 ‘열린 우주’와도 같은 거대한 문서 공간을 꿈꾸었던 것이다. 

일상적인 공동작업, 글쓰기의 재설정

조지 랜도우 역시 하이퍼텍스트 상의 모든 글쓰기는 공동 작업이 된다고 주장한다. 공동 작업의 첫 번째 요소는 저자와 독자의 역할을 비교할 때 나타난다. 왜냐하면 적극적인 독자들은 필연적으로 특정 텍스트를 생산할 때 저자와 공동 작업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공동 작업의 두 번째 측면은 저자와 다른 저자들을 비교할 때 나타난다. 즉 지금 시스템 위의 모든 작가들의 가상적 존재와 함께 작업을 하게 되는 것이다(136쪽).

위키피디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한 작가가 원고를 생산하면 다른 사람이 수정, 첨가 등을 통해 편집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으로 이루어지는 공동 작업 방식이다. 특히 인터넷이 생활 속으로 완전히 파고들면서부터는 다른 공동 작업자와 떨어진 곳에서 다른 시간에 이런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137쪽).

이처럼 하이퍼텍스트는 ‘공동 작업’을 일상화하면서 저자에 대한 우리들의 상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하지만 하이퍼텍스트가 바꾸어 놓은 것은 저자에 대한 기본 인식뿐만이 아니다. 아예 글쓰기 자체를 재설정하는 것이 바로 하이퍼텍스트다. 텍스트가 존재하는 방식과, 우리가 그것을 읽는 방식까지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는 미국의 대표적인 집단 지성 사이트로 꼽히는 슬래시닷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슬래시닷에서는 사용자들이 서로 다른 시간에 기고자, 독자, 중재자, 그리고 중재자들의 심판관으로 활동하게 된다(363쪽)”는 점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월드와이드 웹과 인터넷은 정보에 대한 민주적인 접근이라는 위협과 약속을 동시에 갖고 온다. 하지만 정보기술이 문화, 정부, 사회를 어느 정도까지 변화시킬 것인가라는 점은 여전히 열린 질문으로 남아 있다(367쪽)”는 저자의 주장처럼 하이퍼텍스트와 인터넷이 몰고 올 변화의 바람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 혁명이 제대로 뿌리내릴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기술보다 저작권과 재산권이 우선돼야

저자는 이를 위해 필요한 조건 중 하나로 저작권에 대한 개념 변화를 들고 있다. “공동 작업과 공유가 ‘글 쓰기’의 본질인 하이퍼텍스트 작가의 관점에서 볼 때 복제나 링크 같은 행위를 금지시키는 방식으로 텍스트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는 행위는 어리석을 뿐 아니라 부도덕한 제한이다(371쪽)”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따라서 진정한 권력을 가진 하이퍼텍스트를 개발하기 위한 필수 요건 중 하나는 기술이 아니라 저작권과 작가의 재산권에 관한 법을 향상시켜야만 한다.

‘하이퍼텍스트 3.0’은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시대의 미디어에 대해 많은 문제 제기를 하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은 기술보다는 인문학과 콘텐츠적인 측면에서 하이퍼텍스트가 갖는 의미를 고찰하고 있어 지나치게 현란한 정보기술(IT) 관련 이야기에 지친 독자들에게 신선한 자양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문학 이론에 대한 깊이 있는 담론들이 때론 독서 작업을 힘들게 만들 수도 있겠지만, 기술과 콘텐츠의 결합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그 정도 수고쯤은 기꺼이 감당해야 할 것이다.

주로 IT업계 중심으로 웹 2.0이나 하이퍼텍스트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 한국과 달리 미국에서는 조지 랜도우 같은 영문학자들이 상당히 큰 목소리를 내고 있다. 여기서부터 ‘콘텐츠 중심적인’ 미국과 ‘망(network) 중심적인’ 한국의 차이가 나오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해보게 됐다. 이런 생각의 밑바탕에는 요란한 ‘웹 2.0 담론’을 뒷받침할만한 콘텐츠가 제대로 눈에 띄지 않는 우리 현실에 대한 아쉬움이 진하게 담겨 있다는 말을 덧붙여도 될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