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꼭 10년 전이었다. 한 쪽은 국내 대표적인 컴퓨터업체였고, 또 한 쪽은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로 절정의 기량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 쯤되면 짐작 될 것이다. 바로 삼보컴퓨터와 박찬호 선수 얘기다.

삼보컴퓨터는 지난 1997년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서 위세를 떨치던 박찬호 선수를 광고 모델로 발탁했다. 당시 박찬호는 불 같은 강속구와 폭포수 같은 파워커브를 앞세워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반면 삼보는 당시 그린PC를 앞세운 삼성의 공세로 다소 고전하고 있던 상태. 그렇긴 해도 삼보 역시 국내 대표 PC업체란 명성은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삼보컴퓨터가 박찬호를 광고 모델로 발탁하면서 지급한 광고료는 무려 8억원이었다. 하지만 박찬호 선수를 앞세운 '체인지업' 광고는 시장에서 선풍적인 위력을 발휘하면서 삼보컴퓨터에 '제2의 전성기'를 선사했다.

그 무렵 박찬호 선수의 위력은 대단했다. 시속 155km를 넘나드는 불같은 강속구는 메이저리그에서도 손 꼽히는 명품이었다. 15승은 기본으로 찍었던 그는 내셔널리그를 대표하는 파워피처였다.

다저스 생활 8년 동안 80승을 기록한 박찬호는 2001년 말 5년간 6천500만달러란 거금을 받고 텍사스 레인저스로 이적했다. 당시 그의 연봉은 메이저리그 전체 투수들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거금이었다.

삼보컴퓨터 역시 '2년 후 CPU와 마더보드 보상'이란 컨셉트를 앞세운 '체인지 업' 전략이 위력을 발휘하면서 PC 시장의 강자로 군림했다. 그 위세를 몰아 2002년에는 월드컵 스타였던 김남일 선수를 광고 모델로 발탁해 또 한 차례 풍성한 화제를 선사했다.

하지만 이후 둘은 약속이나 한 듯 부진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2002년부터 텍사스 마운드를 지킨 박찬호 선수는 '먹튀'라는 달갑지 않은 꼬리표를 떼어내지 못했다. 알렉스 로드리게스와 이반 로드리게스 등 최강의 공격진을 보유한 텍사스 팀에서 승수 쌓기에 본격적으로 나설 것이란 기대는 이적 첫 해부터 여지 없이 일그러졌다. 고질적인 허벅지 부상에다 낯선 아메리칸 리그 적응 실패 등이 겹치면서 '배팅볼 투수'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삼보컴퓨터가 겪은 시련도 만만치 않았다. 2000년 이후 세계적인 PC 시장 침체가 휘몰아치면서 심각난 경영난에 시달린 것.

2000년 4조원에 이르던 삼보컴퓨터의 매출은 2001년 이후 계속 줄었고, 2002년에는 5천억원에 이르는 대규모 적자를 기록했다. 결국 삼보컴퓨터는 2005년 5월 법정 관리를 신청하면서 날개 없는 추락을 거듭했다.

삼보가 법정관리를 신청하던 무렵 박찬호 선수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 팀을 옮긴 뒤 재기를 모색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번 기울기 시작한 박찬호와 삼보는 쉽게 시련의 늪을 탈출하지 못했다. 삼보는 좀처럼 성사되지 않는 매각 작업 때문에 맘 고생을 했다. 박찬호 선수 역시 '저니맨'으로 전락하면서 세월무상을 실감해야만 했다.

이처럼 힘든 시간을 보냈던 둘은 약속이나 한듯 2007년 들어 재기의 희망을 틔우고 있다. 삼보컴퓨터는 지난 8월 IPTV 업체 셀런에 인수되면서 국내 대표 PC기업의 명성을 되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 삼보는 최근엔 인기 연예프로그램인 '무한도전' 멤버들을 광고 모델로 발탁하면서 재기를 향한 '무한도전'을 선언했다.

박찬호의 몸부림은 더 눈물겹다. 이달 초 대만에서 열린 올림픽예선에서 맹활약했던 박찬호 선수는 자신의 친정이나 다름 없던 LA다저스에 입단했다. 물론 박찬호의 LA다저스 입성은 금의환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초청 선수 자격으로 캠프에 참가해 메이저리그 입성조차 불투명한 상태다.

하지만 명예회복을 위해 마이너리그 계약을 마다하지 않은 박찬호 선수의 도전 정신에 많은 야구팬들이 진한 감동과 뜨거운 성원을 함께 보내고 있다.

1997년 '체인지업'으로 의기투합했던 박찬호와 삼보. 10년 세월은 그들 모두를 정상의 자리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내몰아버리고 말았다.

삼보는 더 이상 국내 PC 시장의 대표 주자가 아니다. 삼성, LG 등 대기업들이 호령하는 PC 시장에서 삼보가 설 땅은 그리 넓어 보이지 않는다. 박찬호 선수 역시 155km를 오르내리던 불 같은 강속구는 더 이상 던지지 못한다. 어쩌면 불펜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조차 쉽지 않을 수도 있다.

이처럼 변방으로 내몰린 삼보와 박찬호가 지금 힘겨운 도전에 나서고 있다. 한 쪽은 '무한도전' 정신으로 무장한 채 영광 재현을 꿈꾸고 있으며, 또 한 쪽은 '수구초심'을 앞세워 자신의 출발점으로 되돌아갔다.

박찬호와 삼보는 2년 전 따뜻한 정을 나눈 적 있다. 샌디에이고로 팀을 옮긴 박찬호가 2005년 8월 법정 관리로 힘든 시간을 보내던 삼보 임직원들에게 영상편지를 보낸 것. 당시 박찬호는 "지금의 시련이 성장의 밑거름이 될 것"이라며 용기를 잃지 말라고 격려했다.

당시 박찬호가 던진 메시지는 삼보 뿐 아니라 박찬호 자신에게도 진한 울림을 안겨주지 않을까?

그 진한 울림을 안고 박찬호와 삼보는 지금 나란히 힘겨운 재기 과정을 거치고 있다. '무한도전'이란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10년 세월을 무색케 하는 둘의 도전 정신은 지켜보는 이들에게 진한 감동을 안겨준다. 2008년에는 그 감동과 함께 화려하게 부활하는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