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상해 임시정부가 해방 후 초대 내각이 되었더라면 사태는 훨씬 좋아졌을 것이다. 그들은 선거 없이 그대로 정권을 인수한다.
(~ 중간 생략~)
이렇게 해서 한 십년 지나면 일본 아이들이 멍들여놓았던 상처도 가시고 얼이 빠졌던 해골이 제 구실을 하게 된다. 누구 말마따나 마음은 원이로되 손발이 떨려서. 그럴 즈음 외국에 유학갔던 친구들이 하나둘 돌아와서 영감들 시대는 이 정도로…  하는 의견을 슬금슬글 비치면서 근대화니, 국민경제니, 실존주의니 하며 영감들이 자신 없는 시비를 걸어온다. 지저분하게 굴지 않았을 것이다. 해방후 처음되는 보통선거를 위한 계획이 발표되고 곧 이어 제헌국회가 구성된다. ( 중간 생략) 그리고 주석 이하 요인 전원은 입후보를 사양한다. 헌법이 만들어지고 젊고 유능한 정부가 서면서 신화 시대는 끝나고 실무자들의 시대가 시작된다.   최인훈 <회색인> 289-290쪽.

최인훈의 소설 <회색인> 말미에 나오는 글이다. 대학 시절 이 부분을 읽으면서 가슴 찌릿한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신화의 시대'가 들어서야 할 시기에 (신화를 거부하는) 실무자들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민족의 비극이 시작된 것인지도 모르다.

예전에 후배들한테 이런 얘기를 한 적 있다. "지금 막 입사한 당신들이 주축이 될 때 한국의 온라인 저널리즘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것이다." 라고. 그건 내 솔직한 생각이었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온라인 저널리즘 역사에서 '신화의 시대'에 속한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영상문법보다는 텍스트 문법에 익숙한 사람. 캠코더보다는 카메라가, 카메라보다는 키보드가 익숙한 사람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세계'가 너무나 강한 세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터에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가 언론학회의 학술지인 <커뮤니케이션 이론>에 투고한 '상호작용성의 두 차원과 인터넷 저널리스트의 변신'이란 논문을 읽었다. 상당히 흥미로운 논문이었다. (개인적으론 학술논문보다는, 정교하게 잘 쓰여진 르포 기사 같은 느낌을 받긴 했지만.)

특히 저차적 상호작용성과 고차적 상호작용성이란 개념이 내 눈길을 끌었다. 온라인 저널리즘은 면대면 커뮤니케이션 시대의 고차적 커뮤니케이션을 향해 가고 있다는 그의 주장 역시 신선했다. 학술 논문이 요구하는 구체적인 수치가 뒷받침되고 있는 건 아니지만, 나름대로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부분이 있었다. 

저차적 상호작용성을 주로 구현하는 인터넷신문들의 저널리스트는 주로 기존의 전통적 매체에서 근무해온 직업기자들이다. 이들은 기존의 저널리스트 행위, 혹은 전통적 미디어 로직을 기본적으로 유지하되 인터넷의 특성을 부분적으로 활용하는 '저차적 변신'을 한다. 고차적 상호작용성을 구현하는 인터넷신문의 저널리스트들은 주로 인터넷을 통해 새롭게 저널리스트 활동을 하게 된 시민기자, 블로거 등이다. 이들은 뉴스의 소비자에서 생산자로의 '고차적 변신'을 하며, 전통적 미디어 로직으로부터도 자유롭다.
오연호 '상호작용성의 두 차원과 인터넷 저널리스트의 변신'

2000년 초 등장했던 많은 인터넷신문들, 오연호 대표의 진단대로라면 저차적 차원의 상호작용성을 주로 구현하는 인터넷신문들이 비교적 순탄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종이신문에서 나름대로 기반을 닦은 기자들이 주축을 이뤘던 영향이 크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인터넷신문'이란 신생 매체에 몸담으면서도 기자실을 비롯한 각종 헤택을 비교적 쉽게 되찾을 수 있었다.

'빛나는 훈장'과도 같았던 이런 전력은, 하지만 매체 발전이란 측면에선 스스로의 발목을 잡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전통적인 저널리즘의 문법을 쉽게 벗어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저널리즘과 상당히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많은 인터넷신문들은, 아마 이런 태생적 한계를 강하게 안고 있을 것이다. 변화된 매체 환경을 선도해 나가기 위해선 이런 출신 성분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는 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다시 오연호 대표의 논문 얘기로 돌아가보자. 그는 이 논문을 통해 '고차적 상호작용성 복원의 곡선'이란 것을 제시하고 있다. 면대면 커뮤니케이션 이후 하락 일변도였던 고차적 상호작용성이 인터넷신문의 등장과 함께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지 못한 인터넷신문도 많다.)

로저 피들러의 <미디어 모포시스>에 나오는 '공동진화' 개념과 상호작용성 개념을 혼합한 오연호의 이 곡선은, 비록 그의 말대로, 아직은 선험적인, 혹은 실험적인 차원이긴 하지만, 고객를 끄덕이게 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

이걸 좀 더 정교하게 발전시키면 꽤 의미가 있을 것 같긴 한데, '열심히 연구하시라'란 말을 하진 못하겠다. 그에겐 '학자의 길' 보단 다른 쪽이 더 의미가 있을 터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