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희귀 고서적에 취미가 있는' 가난한 작가이고, 남자는 다소 고지식하면서도 친절한 서점 점원이다. 여자의 거주지는 미국 뉴욕이며, 남자는 영국 런던에 살고 있다. 여자는 미혼이고, 남자는 기혼이다.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 하지만 둘은 20년간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편지를 주고 받는다. 때론 고마운 심정을 담아 전하기도 하고, 또 때론 재바르게 움직여주지 않는 상대에게 불평불만을 마구 털어놓는다.  


헬렌 한프의 [채링크로스 84번지]는 이처럼 상큼한 이야기들을 빼곡하게 담고 있는 알찬 책이다. 까탈스러우면서도 정이 많은 가난한 여작가 헬렌 한프. 때론 까탈스럽게 또 때론 풋풋하게 사연을 보내오는 헬렌의 변덕스러운 편지에 항상 여유있게 대처하는 서점 직원 프랭크 도엘. 이 두 사람의 편지는 1949년부터 1969년까지 꼬박 20년간 계속 이어진다. 물론 그 둘을 이어주는 끈은 책이다.

하지만 [채링크로스 84번지]가 전하는 것이 책 얘기 뿐이라면, 흔하디흔한 독서 평론같은 책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책에는 그 이상의 것이 담겨 있다. 한 권의 책을 얻기 위해 온 정성을 다하는 작가와, 그 작가의 '책을 향한 욕망'을 채워주려는 서점 점원의 사랑이 가득 들어차있다. (사실 이 책은 영화로 먼저 만났다.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84번가의 연인'이란 영화에는 앤서니 홉킨스가 출연해 멋진 연기를 선사해줬다.)

헬렌 한프는 좋은 책을 만났을 때는 "책이 너무 훌륭하여 제 누런 골동품 책장이 부끄러울 정도랍니다"(12쪽)며 맘껏 찬사를 보낸다. 뉴먼의 [대학의 이상]이란 책의 초판을 구했을 땐 "이 책을 하루 종일 탁자 위에 두고 타자를 치다가 한번씩 만져보곤 해요. 이게 초판이라서가 아니라 이렇게 아름다운 책은 난생 처음보기 때문이에요. 이걸 제가 소유한다는 사실에 살짝 죄책감마저 들어요."(34쪽)라는 말을 전한다.

자신이 주문한 책이 제 때 오지않으면 "프랭크 도엘씨, 거기서 뭐하고 있는 거에요? 우두커니 앉아 빈둥거리고 있나요? ~ 제가 부활절 토끼에게 당신한테 달걀을 갖다주라고 명령을 내렸어요. 토끼 군이 거기 도착하면 무기력증으로 죽어있는 당신을 발견하게 되는건가요?"(22쪽)라며 불평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그 불평 뒤켠엔 친절하고 믿음직스럽게 자신의 주문을 처리해주는 상대에 대한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 그 믿음이 이들의 우정을 20년간이나 이어준 원천이다.  


이처럼 프랭크와 헬렌이 나누는 우정은 수채화처럼 상큼하다. 그 속엔 문화와 인생, 그리고 예술에 대한 사랑이 절절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사소한 일상의 기쁨마저 서로 나누는 모습에선, 여느 연인들 못지 않은 따사로운 정마저 느껴질 정도다.

결코 입 밖에 내지 않은 둘의 애정은 친애하는 부인으로 시작해, 친애하는 한프양을 거쳐 헬렌으로 바뀌면서 조금씩 암시될 뿐이다. 또 여자가 부르는 호칭 역시 선생님에서 친애하는 프랭크, 프랭키로 발전해나간다.

유별나지 않으면서도 유별난 두 사람의 사랑. 늘 서로를 아껴주고 위해주면서도 끝내 만나지 않는 두 사람. 프랭크와 헬렌이 나누는 '책을 매개로 한 사랑'이 여타의 사랑과 다른 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처럼 아름다운 교제는, 주변의 사람들까지 자연스럽게 '공동체'로 이끌어주게 된다.

프랭크가 죽은 뒤 그의 부인 노라는 헬렌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때때로 제가 당신을 아주 질투했다는 얘기도 이젠 할 수 있겠네요. 프랭크는 당신 편지를 정말 좋아했고 당신 편지들은 어딘가 그이의 유머 감각과 아주 닮았거든요. 또 당신의 글솜씨도 부러웠답니다.”(144쪽)

이 책에서 눈에 띈 구절 몇 가지.

"저는 속표지에 남긴 글이나 책장 귀퉁이에 적은 글을 참 좋아해요. 누군가 넘겼던 책장을 넘길 때의 그 동지애가 좋고,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누군가의 글은 언제나 제 마음을 사로잡는답니다."(50쪽)
"읽어보지 않은 책을 사는 것은 제 원칙에 위배되는 일이에요. 입어보지 않고 옷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죠."(73쪽)
"그렇게 아름다운 것을 브로드웨어 영화표 한 장 값에, 또는 충치 하나 뗌질하는 비용의 50분의 1 값에 평생 소유할 수 있다니, 세상 참 이상하지요?"(83쪽)

이 책을 읽으면서 인터넷서점을 통해 간편하게 책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행복한 것만은 아니란 생각을 해 봤다. 혹시 그 속엔 '정'이 빠진 것 아니냐는, 괜한 투정도 한번 부려봤다. '영혼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책'을 읽은 부작용이다.

책을 덮으면서, 프랭크가 세상을 떠난 뒤 헬렌이 남긴 편지를 새롭게 되새김질 해 봤다. 나 역시 비슷한 감정을 느끼면서.

"이 모든 책을 내게 팔았던 그 축복 받은 사람은 몇 달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리고 서점주인 마크스 씨도요. 하지만 마크스 서점은 아직 거기 있답니다. 혹 채링크로스 가 84번지를 지나가게 되거든, 내 대신 입맞춤을 보내주시겠어요? 제가 정말 큰 신세를 졌답니다."(145쪽)